새벽 6시에 일어납니다.
지난 밤 일행 중 몇 분과 새벽녘에 경주 일대를 자전거로 둘러보기로 약속을 하였기에 일어날 준비를 하고 나갑니다.
어둠이 걷혀가는 시각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여 조금 가다 보니 벌써 어딘가를 다녀오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전거를 바꿔 타고 새벽길을 달려갑니다.
그런데 큰일입니다.
사실 이곳은 제가 길을 잘 모릅니다.
두번째 분을 만나 역시 자전거를 바꾸고 계속 길을 달려갑니다.(수오재의 자전거들이 그리 성능이 좋지 않아서 자전거를 계속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도가도 망덕사가 나오지가 않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분이 있에 여쭤보니 반대편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친절하게도 자기가 길을 안내한다고 하여 우리들은 그분을 따라 반대편으로 다시 길을 갑니다.
얼마만큼이나 갔을까? 좌측으로 저 멀리 망덕사당간지주가 보입니다.
아! 이제는 감이 옵니다.
그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리들은 망덕사지 당간지주를 보러 자전거를 타고 달립니다.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경주의 남산입니다.
망덕사지당간지주(보물 제69호)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 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
이 당간지주는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을 두지 않는 대신, 지주 바깥면의 모서리를 윗부분부터 줄어들게 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내었다. 기둥머리는 안쪽 측면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그리며 외부로 6㎝쯤 깎여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다.
각 면에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망덕사는『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된 사찰인데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망덕사지당간지주 뒷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망덕사지터가 나온다.
(사적 제7호)
망덕사지터는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베껴 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경주에서 불굴사로 가다보면 좌측에 사천왕사지가 보입니다.
그 입구에 서 있는 당간지주이며, 사천왕사지는 지금 한창 발굴 중에 있습니다.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는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물리칠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천왕사지를 지나 조금 가다보면 철길을 지나고 좌측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그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라의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릉을 만날 수 있다.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낭산의 선덕여왕릉을 보고 수오재로 돌아오면선 뒤돌아 본 낭산의 모습, 저 낭산에 선덕여왕릉이 있다.
가을의 새벽길을 달려본다.
수오재의 소나무 숲으로 난 길을 걸어가니 능이 나오는데 사적 제183호인 효공왕릉이다.
효공왕릉은
신라 제52대 효공왕(재위 897∼912)의 무덤이다.
높이 5m, 지름 21.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부분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돌이 몇 개 남아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912년 왕이 죽자 이름을 효공이라 하고, 사자사라는 절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왕이 죽자 사자사 북쪽에 화장해 그 유골을 구지제의 동산 옆에 묻었다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재 이 무덤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사자사의 터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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