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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여행] 성재산(단양휴게소 뒷산)에서 만난 신라의 유적, 신라 적성비와 적성

들꽃(野花) 2011. 5. 19. 06:00

[단양여행] 성재산(단양휴게소 뒷산)에서 만난 신라의 유적, 신라 적성비와 적성

 

중앙고속도로 상행선의 단양휴게소

단양휴게소 뒷산에 신라의 문화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2009년 단양지역의 문화재답사 중, 단양 신라 적성비와 단양 적성을 찾아서 보니 단양휴게소 뒷산에 있는게 아닌가?

참 무심했다고 느꼈었는데

이제는 단양휴게소를 들르면 고개가 나도 모르게 휴게소 뒷산(성재산)의 보호각과 적성을 쳐다보게 된다.

 

단양에서의 1박2일 팸투어의 마지막 코스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와 사적 제265호 단양 적성

이 두 국보급 문화재와 사적지가 이번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왜 마지막으로 잡았을까?

이유인 즉, 우리의 이번 투어의 버스 종점이 바로 지하철 서울역 14번 출구(처음 출발장소)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올라가야하 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성재산을 찾아가는 길은 구단양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겨우 승용차정도의 차량만 들어갈 수 있기에 이곳 단양휴게소를 이용하여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찌됐던 단양휴게소에 버스를 세우고 신라 적성비와 적성을 보러 출발합니다.

 

 

단양휴게소 너머로 성곽이 보이고 그 위로 소나무 숲 속에 보호각이 보인다.

저 성곽이 단양 적성이고, 보호각 안에 국보 제198호인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다.

그럼 출발합니다.

 

 

안내판이 보이고

 

저 멀리 성곽이 보입니다.

 

 

일행들은 벌써 성곽을 다 올라갔는데 꼴찌로 가고 있는 나는 언제 올라가나?

투어의 마지막이어서 그런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는 굳건히 갑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와야 직성이 풀리죠.

 

2009년에 왔을 때 한창 보수 중이었는데 보수가 끝난건지 저것이 진짜 그당시 쌓았던 것처럼 성곽을 보수하였는지 궁금합니다.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앞쪽 길로 가면 단양 적성의 성곽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는 곳에는 벌써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올라가다 뒤돌아 단양휴게소와 중앙고속도로를 내려다 봅니다.

 

마지막 기운을 내 봅니다.

 

드디어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가 내 눈에 들어옵니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단양휴게소 뒤에 있는 성재산의 단양 적성 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입니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여 판독이 가능합니다.

  비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문화재청 자료 참조)

 

 

 

적성비를 살펴보고 사적 제265호인 단양 적성을 보러 갑니다.

 

단양적성은

  단양휴게소 뒷산인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 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문화재청 자료 참조)

 

 

다음의 사진들은 2009년 이곳에 왔을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일정상 저 성곽 위로 갈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했기에 예전의 사진을 이용합니다.

 

 

 

 

 

단양 적성에서 내려다 보는 충주호의 모습입니다. 저 끝에 신단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