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여행

[합천여행]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가야산의 해인사

들꽃(野花) 2011. 9. 30. 11:11

삼보사찰 중 법보종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최대의 총림인 해인사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가야산의 해인사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두둥실 떠있는 날의 해인사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법보종찰의 해인사

사적 제504호로 지정된 해인사를 찾아갑니다.

 

마침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이 열리고 있어 더욱 의미있는 방문이었죠.

2008년에 봄에 왔을 때 호국팔만대장경법회가 있어 정대불사를 본 적 있었는데 오늘도 팔만대장경의 세계문화축전이 있으니 두 번의 방문이 모두 뜻깊은 관람이었답니다.

더욱이 이번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에서는 일반인에게 팔만대장경의 원판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한다고 하니 매우 소중한 여행이다.

팔만대장경의 원판은 이곳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2011 대장경세계문화축전이 열리는 주행사장인 대장경 천년관에서 볼 수 있다.

축전을 둘러보고 오는 길인지 여기 해인사에 와서 우연히 축전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해인사에 올라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가야산 토굴에서 정진 중 왕후의 불치병을 법력으로 치료핸 준 인연으로 국왕이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창건하였다.

 

"해인"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된 말로서 바다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인영처럼 비치듯이 부처님의 지혜 바다에는 온갖 만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니 "화엄경"의 진리에 의지해 수행하여 화엄의 사상을 온 누리에 천명하려는 원력으로 이루어진 사찰이므로 사명을 해인이라 했으며, 화엄 10찰의 하나이다.

 

창건이래 희락조사, 균여대사, 대각국사 등 수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해인사는 조선초(1398) 고려대장경판이 이운(移運) 봉안되면서부터 법보종찰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국강원법고대회가 열리고 있는 장면

 

해인사 주차장에서 올라가며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 왼편으로 돌아가면 해인사로 올라가는 인도길이 있다.

 

가야산의 홍류동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넋이 빠진다.

 

부도탑

성철큰스님의 부도탑도 여기에 있다.

 

오직 한평생을 수도하면서 향기로운 말씀으로 살다가신 스님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도탑이다.

 

비림

 

보물 제1242호 합천 해인사 길상탑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물 제128호 반야사 원경왕사비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로,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고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만들어진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지

가야산의 정상이 이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영지라 부른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 칠불봉으로 출가한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여 가야산을 찾았으나 산에 오를 수 없어 아들들의 그림자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정진 중인 왕자들의 모습이 이 연못에 비쳤다고 한다.

아들을 간절히 그리워 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부처님께서도 감복하신 것일까?

 

해인사를 찾는 이들이 너무도 많아 한하하게 사진을 찍을 수조차 없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일주문과 당간지주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을 맞아 해인사에 들어가는 길에는 

신도와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해인사의 역사를 알게 해주는 고사목

 

해인총림의 현판이 붙어 있는 봉황문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의 행사가 열리고 있는 해인사 경내

 

스님들의 전국강원법고대회가 열리고 있어 축전의 분위기를 한껏 북돋아 주고 있다.

 

이 자리가 2008년에 왔을 때 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을 돌던 장소이다.

 

당시의 전경 사진

 

 

 

 

 

 

'김아타 얼음불상'

삼존불 앞에 얼음으로 조각된 불상이 놓여 있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축전행사에서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을 즐기는 아이들

 

 

 

정중탑과 석등

이곳에서도 오늘 밤에 열리는 불교 행사 준비로 무용수들의 연습과 조명 장비들로 북적이고 있다.

절 하면 한가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데 이런 행사가 있을 때는 좀 부산스럽기 하다.

하지만 이렇게 대중과 좀더 가까이 하려는 불교행사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창 연습중인 무용수들

 

해인사 석등(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해인사삼층석탑(정중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대적광전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판전으로 올라가는 길

해인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대장경

우리에게 팔만대장경으로 알려진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국보 제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행사장 안내

 

 

 

 

 

 

합천 해인사 (陜川 海印寺) / 사적 제504호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등 (치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