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여행

[진도여행]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선생의 작품을 보자-소치기념관

들꽃(野花) 2012. 3. 18. 21:00

남종화의 숨결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운림산방

국가 명승 제80호로 지정된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선생(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냈던 화실로 소치기념관은 서화류와 수석전시실, 영상실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문 등 5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소치 허련선생의 작품을 감상해보자.

 

 

산수도 / 소치 허련

看山終日倚高樓(간산종일기고루)

晩渡何人更喚舟(만도하인갱환주)

높은 누대에 의지하여 하루종일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양 무렵에 어떤 사람이 다시 배를 부르고는

 

 

 

 

운림산방의 화맥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네요.

 

소치 허련선생의 '송죽매국'

 

소치 허련선생의 '산수화 8곡 병풍'

 

문화해설가의 작품해설을 열심히 듣고 있네요.

 

 

소치 허련선생의 '매화도'

百千年蘚着古樹(백천년선착고수) : 백년천년 동안 이끼는 고목에 붙어 있고

一兩點春供老枝(일양점춘공노지) : 한두 점 봄기운은 늙은 가지가 제공해 주는구려.

 

 

산수도

소치의 그림으로 보기 드문 대작

 

매화도

 

운림각도 / 소치 허련

58세되던 1866년 여름에 그린 것으로 허련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후기의 대표작이다.

 

묵죽도

 

 

전시실 내부

 

 

 

파란 하늘이 눈이부시네요.

 

눈을 돌려 사방을 보니 모두가 그림같네요.

 

그림처럼 아름다운 운림산방

 

남농기념관 홈페이지에 있는 소치 허련선생의 일대기를 옮겨본다.

 

1808년 진도에서 출생. 호는 소치 .자는 마힐. 이름은 유(維)라 하다가 뒤에 연 으로 개명
1835년(28세) 초의대사의 소개로 서울에 가서 추사 김정희의 집 월성궁에 머물며 문하생으로 본격적인 서화수업
1840년(33세) 잡시 귀향했다가 다시 추사댁에 머물면서 계속 서화수업을 함. 이해 7월 추사가 예산 고향집으로 물러나자 함께 가서 머물다 추사의 유배를 맞음
1841년(34세) 2월에 제주 대정에 있던 추사의 적소로 찾아가 서화수업을 하다가 6월에 둘째 아버지 상을 당해 귀향
1843년(37세) 추사의 소개로 해남 우수사 신관호를 찾아가 그의 막중에 머물음
1846년(39세) 신관호의 환조에 함께 입경하여 이재 권돈인의 집에 머물며 헌종께 그림을 그려 바침
1847년(40세) 다시 제주 대정으로 추사를 찾음
1848년(41세) 고부감시를 거쳐 10월에 친입회사에 합격, 헌종이 3백금을 하사
1849년(42세) 정월에 처음으로 헌종앞에서 어연의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리고 왕실 소자의 고서화에 대한 품평을 함. 헌종이(시법입문)을 하사.5월에 다시 헌종 앞에 나아가 네 번 그림을 그림. 그후 헌종 승하.
1850년(43세) 해남 대흥사로 초의 대사를 찾아 뵘
1855년(48세) 과천으로 추사를 찾음. 유산 정학연을 만난뒤 다산묘소에 참배함
1857년(50세) 귀향하여 화실 운림산방을 세움.1859년 (52세)권돈인의 장례에 참배
1860년(53세) 전주에 살며 작품활동.
1866년(59세) 상경하여 대신 민승호,김홍근,정원용의 집을 주유하며  서화를 품평하고 그림을 그림.이 무렵 금강산행을 기도했다가 중도에 귀향.
1878년(71세) 다시 상경하여 대원군,민영의등과 만나고 이후 각지를 주유하며 작품활동
1887년(80세) 선략장군행용양위부과에 제수되었다가 곧 통정대부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름
1893년(86세) 9월에 장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