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여행

[경주여행] 죽어서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볼 수 있는 이견대

들꽃(野花) 2012. 3. 26. 15:57

경주로 떠난 1박 2일 여행에서 처음으로 찾은 곳, 이견대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로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고 한다.

 

뭉게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파란 하늘이 너무나 멋지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지만 햇볕은 따뜻해 나들이 하기에 좋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진다.

 

문무대왕릉은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으로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던 왕으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 아래 동해를 향한 구멍을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경주 이견대는 사적 제159호로 1967년 8월 1일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견대가 있는 뒷산을 10분 정도 오르면 문무대왕릉과 감포 앞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는 세 분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한 분은 전화 통화를 하고 또 한 분은 사진을 찍고, 다른 한분은 사진 찍은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결론은 모두 저 바다와 문무대왕릉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세 분이 자리를 비우고 없을 때 문무대왕릉을 사진에 담는다. 

 

 

1970년대 발굴 조사 때에 건물 터가 발견되어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 새로이 지었다고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이다.

 

 

건물 대들보에 새겨진 용

어쩜 용이 된 문무왕이 아닐까?

 

이견대의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