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여행

[경주여행] 따뜻한 봄날 경주의 계림, 월성, 석빙고, 내물왕릉, 월정교를 둘러보다.

들꽃(野花) 2012. 4. 11. 05:00

경주로 떠난 1박 2일의 여행

경주음식의 별채반 6부촌 육개장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경주의 계림, 월성 등을 둘러본다.

중요민속문화제 제27호 경주교동최씨고택과 경주향교를 둘러보고 계림으로 들어간다.

오랜된 소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새순이 아직 나오지 않아 앙상한 가지가 겨울의 황량함을 연상케 한고 있다.

향교의 담벼락과 오래된 소나무들, 그 사이로 신라시대의 능이 하나 보인다.

 

참고로 능과 고분, 총의 구분을 아십니까?

능은 임금이나 왕비의 묘를 말하고, 고분은 묘를 발굴하지 않은 오래된 묘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총은 발굴은 하였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에 붙인다.

예를 들면, 천마총, 황남대총 등처럼.

 

계림의 숲 속에는 사적 제188호로 지정된 경주 내물왕릉이 있으며, 내물왕릉 뒤로 많은 고분들이 보인다. 경주의 고분이 150기가 넘는 다고 하니 고분의 갯수를 봐도 경주의 역사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계림은 오래된 느티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계림 입구 좌측에는 첨성대가 우측에는 경주의 궁궐이 있던 월성이 있으며 월성 안에는 조선시대의 석빙고가 있으며, 월성의 바깥쪽에는 춘양, 월정교가 있다.

 

 

계림의 상징

오래된 느타나무의 가지 아래에 서라벌의 밤하늘을 관측하던 첨성대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사적 제19호 경주 계림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오래된 느티나무 숲이 많은 이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오래된 나무가 휘어져 있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계림의 담장 너머로 첨성대가 보이고 

 

김알지에 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는 비와 보호각

그 앞에 노란색 옷을 입은 꼬마들이 보호각 앞을 서성이고 있다.

 

계림비각

 

사적 제188호 경주 내물왕릉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파란 잔디가 파릇파릇 돋아날 그날을 그려본다.

 

이곳은 벌써 푸릇루릇하게 새싹이 돋았다.

 

경주월성

 

유채밭 너머로 첨성대가 보인다.

따뜻한 봄날이 되면 이곳은 유채꽃 세상이 된다.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월성을 둘러싼 소나무와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석빙고 앞에서 젊은 아가씨 둘이서 셀프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빙고 내부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솜사탕 같다.

 

사적 제457호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일정교 · 월정교는 『삼국사기』경덕왕조에 '경덕왕 19년...2월...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서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시대가 변천되면서 월정(月淨)교는 월정(月精)교로, 춘양교는 일정교, 효불효교, 칠성교 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각각 해와 달의 정령을 상징하는 일정교와 월정교로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여겨지며, 효불효교나 칠성교는 조선시대에 민간의 전설이 결부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일정교는 『삼국사기』경덕왕 19년(760)조에 기록된 "춘양교"로 추정되는 다리로 동, 서편 교대와 날개벽, 3개소의 주형(舟形)교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길이는 최소 55m, 상판의 너비는 최소 12m, 교량의 높이는 5m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교는 남, 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교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樓閣)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일정교지 · 월정교지는 우리나라의 고대 교량의 축조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정교는 경주 남산과 남쪽 외지를 연결하고, 월정교는 신라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