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여행

[울진여행] 1500년전의 세상을 우리들에게 알려준 울진봉평신라비

들꽃(野花) 2012. 5. 3. 10:51

울진 봉평신라비전시관

 

따뜻한 봄날 경상북도 울진으로의 1박 2일의 여행을 떠난다.

남쪽 나라는 비가 내리고 있으며, 서울에서 울진까지 가는 동안에도 차창너머로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동해의 푸른바다와 파란하늘을 기대해 보지만, 하늘은 우리의 여행을 시기라도 하는 듯 맑은 하늘을 선사하지 않고 비를 내려 여행길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아시다시피 여행에서 중요한 것중 하나가 사진을 찍는 것인데 이렇게 비가 내리니 우산을 들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혹시라도 카메라에 비라도 맞으면 큰일나므로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서울에서 울진까지가 4시간이 넘는 거리이므로 울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점심을 먹고 나서야 여행 일정에 들어간다.

그 첫번째 방문이 국보 제242호로 지정된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을 찾아 봉평신라비에 대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몇년전에 왔을 때는 현재 전시관 입구의 느타나무 아래 비각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신라비의 중요성에 의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전시관을 짓고 비를 그안에 안치하였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이고, 소재지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이다.

봉평신라비의 크기를 보면 비의 높이 204cm, 상폭 32cm, 중폭 36cm, 하폭 55cm(1면)으로 재질은 변성화강암이다.

울진봉평신라전시관은 신라비와 각종 비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도록 되어있고, 전시관 야외에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많은 비석들이 설치되어 있다.

 

울진봉평신라비의 내용을 보면

울진 지방이 신라에 편입된 후 왕경으로부터 노인촌이라 불릴 정도로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후 신라는 울진지역민들에게 일정한 은혜를 베풀었지만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울 에워싸며 중앙 정부에 항거하였다. 법흥왕은 대군(중앙군)을 일으켜 평정한 후 열세명의 고위관리들과 함께 사후처리를 의논해서 결정하였다. 이때 결정한 사항의 집행을 담당한 자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와 거벌모라 도사와 실지도사였고, 이일을 총괄적으로 주관한 자는 실지군주였다. 그들은 대노촌에 일정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고, 중앙 정부에 저항한 자들에게 처벌로 장 60대와 장 100대를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박사로 하여금 지방민을 교화하고 이를 비석에 새기게 하였다. 비문을 쓴 사람과 새긴 사람은 왕경인이고, 비를 세우는데 필요한 노동력은 거벌모라 출신이 제공하였다.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신라비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에 봄비가 내리고 있다.

 

야외무대

 

울진봉편신라비전시관

 

각종 비석들이 설치되어 있는 야외전시장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내부

 

 

 

울진봉평신라비의 원문을 살펴보자

갑진년(524)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사탁부의 사부지(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본파부의 무부지 간지, 잠탁부의 미혼지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 태아간지, 길선지 아간지, 일독부지 일길간지, 탁(부)의 물력지 일길간지, 신육지 거벌간지, 일부지 태나마, 일이지 태나마, 모심지 나마, 사탁부의 십사지 나마, 실이지 나마 등이 하교하신 일이다.

 

따로 영을 내리시길, "거벌모라(지금의 울진군 중심 지역)와 남미지는 본디 노인(복속된 지역민을 낮추어 부른 말)이었다. 비록 노인이었지만 앞선 시기에 왕께서 크게 법을 내려주셨다.(율령 반포 등을 통해 노인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 그런데 길이 좁고 오르막도 험난한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싸니 대군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한 자들은 (처벌해야 사람들이 땅을 안전하게 하고 왕을 높일 것이다.) 대노촌은 값 다섯을 함께 부담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노인법을 받들라."고 하셨다.

 

신라 6부에서 얼룩소를 잡아(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일을 처리한) 대인은 탁부의 내사지 나마와 사탁부의 일등지 나무, 구차 사족지, 탁부의 비수루 사족지, 거벌모라 도사(지방관의 명칭) 졸차 소사제지, 실지(지금의 삼척시) 도사 오루차 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 니모리 일벌, 미의지 파단, 탄지사리 일금지와 아대혜촌 사인(지방관 보좌역) 나이리는 장 60대에 처하고, 갈시조촌 사인 나등리 거△척, 남미지촌 사인 익사는 장 100대에 처하고, 어즉근리는 장 100대에 처한다. 실지 군주(주의 장관)인 탁부 개부지 나마가 일을 맡았다. 글 쓴 사람은 모진사리공 길지지와 사탁부 선문 길지지이고, 돌에 새간 사람은 탁부의 술도 소오제지와 사탁부의 모리지 소오제지이다.

 

석비를 세운 사람은 탁부 박사이다. 이때에 하교하시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논어에 나오는 구절임)"고 하셨다.

거벌모라의 이지파 하간지와 신일지 일척이 살아 있을 적에 일을 마쳤다. 398이다.(의미 미상)

 

 

 

 

 

 

 

 

울진봉평신라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해 출신부명 또는 지역명을 알 수 있고, 이름과 지위 또는 관등과 직책을 알 수 있다.

 

얼룩소를 잡아 하늘에 제를 지낸 까닭을 알 수 있으며

 

장60대와 장100대를 치는 장형이 나오는 것은 신라가 오형제(태, 장, 도, 유, 사)를 실시한 것을 보여준다.

 

 

석비는 역사를 말한다.

 

우리나라 석비의 모습들과 석비를 만드는 과정 등을 보여주고 있다.

 

 

 

울주천전리암각화로 청동기시대의 그림에서 문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울진에 분포되어 있은 석비들을 전시관 앞 광장에 전시해 놓고 있다.

 

야외전시장

 

 

 

 

광개토대왕비

 

 

 

 

어제 비가 내려 전시관의 전경이 그리 좋지 않아 비가 그친 후 다시 찾은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