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군 관아와 향교 (金堤郡 官衙와 鄕校) / 사적 제482호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교동 7-3 등 일원
김제는 삼국시대 때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郡)으로써 읍의 격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따른 위계를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다
김제 관아는 조선시대 당시의 건물(동헌, 내아, 피금각, 관리사로 부르는 건물 1채)이 다수 남아 있고. 향교는 대성전이 조선시대 건물이고, 명륜당과 문루인 만화루 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나 관아 및 향교 건축의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어서,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우리나라 읍치(邑治)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관아 및 향교가 인접한 거리(관아의 동헌과 향교 사이의 거리 약 130m)에 함께 보존되고 있어 조선시대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고,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함께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김제동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
조선시대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던 관아건물로서 현종 8년(1667)에 처음 지어 근민헌(近民軒) 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事七軒)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음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앞면 7칸 · 옆면 4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의 오른쪽 6칸에 대청이 있고 왼쪽 4칸은 온돌방이다. 외벽은 사방 전체에 같은 형태의 문이 달려있으며, 앞면 가운데 1칸과 뒷면 왼쪽에 출입문을 달았다.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앞면을 7칸으로 꾸며 위엄있는 건축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2007. 7. 31 사적 제482호로 지정되었다.
김제내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
김제내아는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살림집이다.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김제 내아는 조선 현종 8년(1667)에 동헌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는 지금 남아 있는 ㄷ자형의 안채 이외에도 부속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모습이며 동헌과 함께 남아있는 내아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중·상류 계층의 주택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근민헌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라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김제향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김제향교는 조선 태종 4년(1404)에 세웠고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었는데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앞면에 사당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과 옆이 트인 퇴칸을 두었고 몸채쪽에는 문을 달았다. 중앙칸의 가운데에 2짝의 문을 달고 양쪽 기둥에는 골판벽을 끼웠다. 양 끝칸에는 1짝씩 문을 달고 그 옆 공간에도 골판벽을 끼워 특이한 앞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양쪽 끝에 있는 기둥에는 건물 옆면쪽으로 지겟다리 모양의 굽은 버팀목을 기둥 중간에 박았는데, 그 형태가 장수향교의 대성전(보물 제272호)과 같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며,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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