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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여행] 백제 사비시대의 절정, 불교문화의 중심인 부여정림사지

들꽃(野花) 2012. 7. 6. 09:52

[부여여행] 백제 사비시대의 절정, 불교문화의 중심인 부여정림사지,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를 한성시대, 공주시대,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사비시대로 크게 구분하는데

오늘은 백제 사비시대의 절정을 이루는 불교문화의 중심축에 해당하는 부여 정림사지를 찾아간다.

 

부여정림사지는 백제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진 이후 백제 사비시대의 중요한 유적지이며, 특히 일본 고대사찰의 효시를 이룬 곳이다.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며,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동·서·남·북 등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불어 사찰을 건립한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의 모습이 중국 사사 『주서(周書)』백제전에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라고 적혀있다.

정림사지와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내의 황궁과 영녕사와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실 내지는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성의 공간으로 정림사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에 있는 문화재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사적 제301호 부여 정림사지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 구조다.

이 가람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가람조영의 모태가 되어 백제와 동일한 일본의 사천왕사(시텐노지, 四天王寺) 양식을 낳았다.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절터로

금당터의 붉게 탄 소토면으로 보아 백제 멸망 당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당시의 절 이름을 알 수 없으나 고려 현종 19년(1028)에 정림사라는 이름으로 이 절이 중창된 것으로 보이며,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1942년 발굴 조사시 출토되어 정림사의 중창시기와 정림사의 사찰이름을 알려주고 있다.

 

 

 

 

 

중문 바깥에 만들어진 연못으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만들었다.

이는 현재까지 발견된 최고(最古) 연못이며, 이러한 연못의 존재는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국보 제9호)

 

석탑 앞에 있는 터가 중문지로

석탑기단에서 남쪽으로 약 14m의 거리에 있으며, 초석을 놓았던 적심석은 동서 2열로 8개가 배치되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정면 11.3m, 측면 5.3m의 크기이다. 고려시대 중문지의 기단은 깬돌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으며,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여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다고 본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인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의 그 의의가 크다.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까지인 538 ~ 660년으로 언제 석탑이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구조를 보면

여러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세웠다.

1층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엔타시스가 분명한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으며, 탑신 2층부터 몸돌은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한 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으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서 간략화된 공포 형태를 재현했다.

 

지붕돌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 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 노반석이 있다.

 

몸돌에 비래 지붕돌의 폭이 좁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하며, 안정감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이다.

 

화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석탑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660년 8월 15일 당나라 소정방이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 새긴 글자가 남아있고, 조선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관련기록이 남아있다.

 

 

 

금당지

석탑 기단에서 북쪽으로 약 15m의 거리에 있으며,

금당지의 하층기단에 적심석이 남아 있는데 북편 7개, 남편 6개, 서편 4개, 동편 7개, 건물내부에 1개소다.

적심석의 배치로 보아 건물은(퇴칸을 포함) 정면 7칸, 측면 6칸으로 정면 18.75m, 측면 13.8m의 크기이다.

 

 

서편 건물지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불신의 입체감이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손상으로 인해 그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친근감을 주는 형상과

조각이 우수하여 주목되는 걸작으로 고려때의 번성함을 보여준다.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와 보관은 화재와 마손으로 손실되어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이며,

머리위에는 둥근 보관이 올려져 있으며, 이목구비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신체는 불신과 불두를 잇는 짧은 목에 삼도 표시가 없으며,

좁고 둥글게 표현된 어깨와 법의 형태는 마멸로 알 수 없다.

이밖에 수인과 자세 또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고 있다.

 

다만 수인은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 표현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로 추정되며,

연화대좌의 연화문이나 큼직한 안상장식, 크기로 규모로 보아 그 장대함을 알 수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지박물관

 

 

박물관은 중앙홀, 백제불교문화관, 정림사지관과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홀 전시관에는

정림사지 전시관의 전체적인 체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잇는 종합안내사인이 두었으며

석제문양 퍼즐 맞추기, 유물조각 맞추기, 문양적어보기 등의 체험코너가 잇으며,

방문객의 만남의 공간 또는 관람 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정림사로 가는 길의 정림사지관으로

정림사가 갖는 의의와 가치를 역사적, 미술사적인 측면으로 설명하며, 불교문화의 중심인 사비가 있었음을 소개한다.

 

 

주소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길 36

홈페이지 : http://www.jeongnimsaji.or.kr/

 

관람시간

  - 동절기 : 10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10:00 ~ 17:00

  - 하절기 :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09:00 ~ 19:00

 

찾아오시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