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여행] 오십천의 맑은 물에 죽서루에 앉아 세상시름 내려 놓으니
삼척을 가로지르는 오십천을 죽서루에 앉아 내려다본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 간간히 흘러가고
유유히 흐르는 오십천을 바라보니 세상시름을 모두 내려놓게 만든다.
옛 성인들이 숱하게 다녀가고
죽서루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갔지만
나는 오늘 여기에 왔다.
죽서루에....
죽서루를 찬양한 선비들에게 비할 바 못되지만 아마도 그들도 내가 느낀 이 마음은 같지 않을까?
세상을 돌아볼 수 있는 시점에 찾아온 죽서루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곳이다.
죽서루는
"관동제일루"라는 명성에 걸맞게 오십천 등의 주변경관이 너무나 아름답다.
조선 중기의 화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고려시대 이후 수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 그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듯이 오늘 찾은 죽서루도 나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오십천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병산(1,259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며, 미인폭포를 이루었다가 심포리에서 북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도계읍, 신기면, 미로면을 지난다.
삼척시 마평동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오분동 고성산 북쪽에서 동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으로 길이는 약 59.5km이다.
강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동국여지승람>에 "오십천은 삼척도호부에서 물의 근원까지 47번을 건너야 하므로 대충 헤아려서 오십천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어의 회귀천으로 유명하며 은어, 숭어, 버들개 등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는 하천이다.
오십천변에는
관동8경 가운데 하나인 죽서루(보물 제213호)가 있으며, 유역내에 실직군왕릉(강원도 기념물 제15호), 삼척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삼척향교(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등이 있다.
죽서루
죽서루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누각으로 보물 제213호로, 죽서루와 오십천이 명승 제28호로 함께 지정되어 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다른 관동팔경의 누와 정이 바다를 끼고 있는 것과 달리 죽서루만이 유일하게 하천을 끼고 있다.
죽서루의 건립시기는 미상이나, 여러 역사적 기록을 볼 때 고려시대때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고려 원종 7년(1266)에 이승휴가 안집사였던 진자후와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1266년 이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서루란 이름은
누의 동쪽에 대나무숲이 있었고, 그 죽림안에 죽장사란 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죽서루로 명명되었다.
또한 죽서루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죽서루의 오른쪽에는 정철 송강의 가사비가 건립되어 있다.
누각은
정자와 함께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을 대변하는 건물이다.
흔히 누각과 정자라 하면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경관을 조망하기 편리한 곳에 인위적으로 조성을 건축물을 말한다.
개인이나 단체 등의 집회, 강론, 휴식, 접객 그리고 정기적인 회합의 공간으로 건립되어진 정자, 누대, 누각, 성의 문루로 정의할 수 있다.
정자와 누각의 차이점은
정자가 자연속에서 개인적인 수양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 수양공간이 되는 셈이다.
또한 누각은 보통 2층에 우물마루를 둔 대규모이고, 정자는 누각보다 작은 규모로 주로 단층이다.
우리나라에서 누각이 언제부터 건축되어 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형태상의 특징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와 오늘날의 원두막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백제 무왕 37년(636) 8월 "신하들과 망해루에서 잔치를 치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가장 빠른 것이다.
누각은
그 기능에 따라 군사시설로서의 누각, 교육적 종교적 회합장소로서의 누각, 순수한 접대나 향연을 위한 누각으로 나뉘어진다.
죽서루는
객사(동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휴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향연을 위한 누각"이라 하겠다.
해선유희지소
조선 헌종 3년(1837) 삼척부사 이규헌의 글씨이다.
정조어제
어제
누각 내에 있는 제일계정 (第一溪亭)이라는 현판으로 조선 현종 3년(1662)에 삼척부사 허목의 글씨이다.
죽서루는
자연석 위에 길이가 서로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워 지은 정자로 관동팔경의 정자 중 가장 크다.
전면에 보이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은
조선 숙종 41년(1715) 삼척부사 이성조의 글씨이다.
죽서루안에는
부사 허목이 쓴 "죽서루기"와 당성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를 비롯하여 여러 현판과 일중 김충현이 쓴 율곡 이이의 "죽서루차운", 조선 정조가 직접 지은 시판 등 26개의 현판이 죽서루에 걸려 있다.
죽서루의
누각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꽃으로 수 놓은 연등천장이며, 우물마루가 끝나는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우고 기둥 사이는 벽체는 창호없이 모두 개방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죽서루는 정면 7칸으로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한다.
성혈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 기호, 성혈 등을 그리거나 새겨 놓은 것을 말한다.
죽서루의 선사 암각화는 바위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은 성혈 암각이다.
성혈은 선사시대에 풍요, 생산, 다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 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칠월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구멍에 좁쌀을 담아 놓고 치성을 드린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서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다.
셩혈의 제작은 암반을 쪼아 깊이 판 다음 원형의 돌 또는 나무로 연마,구멍을 넓혀서 만든다.
이곳의 성혈은 용문바위 위에 직경 3~4cm, 깊이 2~3cm 크기이며 모두 10개이다.
용문바위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사후 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바위이다.
그 후 용문바위는 아음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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