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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김삿갓면여행] 한 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김삿갓, 방랑의 종착지는?

들꽃(野花) 2012. 10. 26. 15:44

[영월/김삿갓면여행] 한 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방랑시인 김삿갓, 방랑의 종착지는?

 

방랑시인 김삿갓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어드메뇨.

그의 시 한수 없는 곳이 대체 어드메뇨.

삿갓쓰고 단장하나만 들고 전국을 방랑한 김병연

 

그는 무엇땜시 그토록 기나긴 세월동안 방랑을 해야했던가?

 

홍경래의 난

조선순조 11년(1811) 신미년에 서북인(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의 행악에 분개하여 홍경래(1780~1812)가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의 난이 김병연을 삿갓을 쓰고 방랑하게 만든 사건의 발생이다. 

 

강원도 영월의 깊은 두메산골에 있던 김병연과 홍경래와는 어떤 관계일까?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이는 또 무엇인고?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강원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열렸던 백일장 대회의 시제(詩題)다.

 

김삿갓유적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76-1번지 / 033-375-7900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로 돌아가보자.

홍경래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 등지를 파죽지세로 힘쓸어버리고 군사적 요새인 선천으로 쳐들어가게된다.

가산 군수였던 정시(鄭蒔)는 일개 문관의 신분으로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선천의 방어사 였던 김익순은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가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사정이야 어찌 됐던 이듬애 2월에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자 반란군에게 항복한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이때 병연은 여섯살, 형 병하는 여덟살, 아우 병호는 젖먹이였다.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 김성수가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주었다.

 

그뒤 조정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벌을 주고, 가족이 두려워했던 멸족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두 형제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들어가게 된다.

 

이상이 김병연이 영월에 들어와서 살게된 사연이다. 

 

 

시제를 받아보고

정의 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를 가졌던 김병연은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반란군에 항복한 김익순의 불충한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게된다.

 

김병연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기쁨에 빠져 있는 날

어머니가 들려주는 김병연의 가계를 듣게 된다.

 

청청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으리라.

어찌 자기가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선천 방어사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일줄이야.

제사 때도 신주를 모시기는 커넝,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로 속여왔던 어머니의 기나긴 살아왔던 이야기를 듣는 김병연

김병연의 고민은 시작된다.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김병연이

우리에게 알려진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세상을 떠돌게 된다.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 부른다.

~~~~~~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리선 안되느니라.

 

 

 

청천간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끊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랴.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자기가 천륜을 저버리고 조부를 만고의 역적으로 몰았으니

 

그와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방랑하지 않을까?

 

뜨거운 젊은피를 가진

관직에 나아가 세상에 날개를 활짝피고 날려는 나이에

날개가 무참히 떨어져나간 그 슬픔이

낙담이

어찌 그를 방랑의 길로 나가는 것을 막을까?

 

 

 

 

그의 방랑기를 찾아본다.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긴 지팡이과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는 홍성에 있는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길을 떠나 정반대인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잠시 집에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가족들과 일체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된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으나

한때 그의 아들 김익균을 만나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후 마지막 방문지인 전남 화순에 들렀던 중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의 아들 익균이 부고를 듣고 화순에서 병연의 시신을 영월로 운구하여

안장하였다.

 

 

 

 

김병연 유적지

김삿갓 유적지

 

그가 남겼던 수 많은 시들이 그의 무덤앞에 시비가 되어 돌아와 있다.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살아야 했던 김병연, 김삿갓

 

 

 

 

 

 

 

 

 

 

이제는 김병연, 김삿갓이 방랑을 마치고 영면을 하고 있다.

 

그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어쩜

나의 모습이 아닐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굳이 목적지가 없어도 길을 나서고 싶은 이 마음

방랑벽이라고 해야하나.

 

 

 

그 옛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방랑을 해야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우리가 내 자신을 찾으려 방랑을 한다.

나를 찾아서

어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길에서 찾고픈 마음에

오늘도 길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