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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여행] 하늘을 수 놓은 흰눈이 펑펑내리는 날 찾아간 교종 수사찰 - 남양주 봉선사

들꽃(野花) 2013. 2. 19. 17:27

[남양주여행/절집여행] 하늘을 수 놓은 흰눈이 펑펑내리는 날 찾아간 교종 수사찰 - 남양주 봉선사

 

2013년 2월 3일(음력으로 12월 23일)

나의 생일이다.

생일이라고 거창하게 야그를 하는 게 아니라 생일날 나 홀로 여행을 떠나 찾아간 곳이 봉선사이기에 더욱더 생각이 난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춘천으로 가는 길,

고속도로로 달리면 주변풍경을 볼 수 없기에 북한강 강변을 따라 가려고 양수리쪽으로 길을 잡는다.

양수리에서 강의 오른쪽 길을 따라 달려간다.

아니 천천히 간다.

뭐 급할 것 없는 드라이브 길

뒤의 차들이 빵빵거리고 빨리가라고 하지만, 정규속도를 유지하며 주변 산천을 구경하며 길을 간다.

저 멀리 강건너 수종사도 보이고, 강변길에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봄날의 벚꽃이 피면 멋있을 것 같다.

청평까지 올라가다 춘천으로 가지않고 광릉수목원, 광릉이 있는 봉선사로 길을 가려고 발걸음을 돌린다.

내 여행은 이맛이다.

즉석에서 가고픈 곳이 생기면 운전대를 돌리면 된다.

즉, 발가는 데로 가는 여행,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진접에서 봉선사로 가는 길

살짝이 눈발이 날린다.

얼른 가서 되돌아 나오리

이게 얼마나 끔직한 생각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눈내리는 봉선사

 

 

봉선사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수목원이 있는 그 길을 따라간다.

울창한 아름드리 잣나무 숲이 길을 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거기에 눈발까지 날리니

눈내리는 봉선사의 모습을 그려본다.

 

 

눈속에 갇혀버린 일주문

 

 

봉선사로 가는 길

온 세상이 하얗다.

눈내리는 날이면 온 동네가 내 세상이었었는데...

 

 

일주문을 지나 봉선사 가로수 길을 걸으면 연꽃 유치원 못미쳐 우측에 비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봉선사

세조의 능침사찰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교종의 수사찰, 교종의 갑찰 등의 수식어가 붙는 절이다.

봉선사사 자리한 운악산은 1927년에 편찬된 봉선본말사지, 봉선사지 조에 한국의 5대 명산 중(동쪽의 금강산, 서쪽 구월산, 남쪽 지리산, 북쪽 묘향산, 중앙 운악산)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중국의 오악(dh五岳)을 모방하여 경기지방에도 오악을 설정하였는데, 개성의 송악, 과천의 관악, 연천의 감악, 가평의 화악 등과 함께 봉선사가 있는 양주의 운악이라 하였다.

 

현재 운악산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울창한 산림이 있고, 다양한 수종의 동식물들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창건된 봉선사와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와 왕비인 정희왕후를 모신 광릉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1551년(명종 6)에 교종(敎宗)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교종의 승과고시를 치르고 승려들이 모여 교학을 익히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오늘날 봉선사는 한국불교에 있어 교종의 대본산으로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2년에는 원흥사(元興寺)가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 되면서 봉선사는 전국 16개 수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경기도내의 본산이 되었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 시행으로 전국사찰이 31본산 체제로 나눌 때 교종본산으로 지정되어 경기도내 23개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196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가 된 이후 17개 지역 72개 사찰을 관장하며 경기북부 지역의 불교진흥에 힘쓰고 있다.

 

 

봉선사는

 

969년(광종 20) 법인국사 탄문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 운악사라고 하였다. 하나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한 창건의 내력은 알 수 없다.

창건이후 조선시대 초까지 봉선사의 내력을 전하는 자료가 없지만, 1469(예종 1) 정희왕후가 대규모 가람으로 중창하면서 봉선사는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운악산에 능을 마련하고 세조의 능침사찰로서 봉선사를 중창하였다. 불사를 마친 그해 9월 7일에 세조의 천도재를 이곳에 열었으며 정희왕후는 다시 숭은전을 세워 세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이러한 정희왕후의 후원은 예종이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로 절 이름을 '봉선사(奉先寺)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하게끔 하였다.

이로서 처음 창건될 때 운악사는 봉선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순식간에 내 앞길을 덮어버린다.

 

 

 

 

 

500여 년 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먼저 가신 세조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봉선사를 중창하며 절 입구 양지바른 곳에 심었던 느티나무

하얀 눈을 덮어쓴

세월의 흐름속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느티나무

오늘따라 더욱 더 아름답게 보인다.

봄날의 푸릇푸릇함도, 여름날의 무더위도

오늘의 눈 세상만은 못할 것 같다.

 

 

 

 

 

정말로 풍성히도 내린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것을 무엇이라하지.

함박눈이라고 하나.

하여간에 징하게 내린다.

 

 

 

대보름이 가까워지나

 

'옴마니반메홈'

복덕은 안으로, 재앙은 밖으로

 

 

 

 

 

 

청풍루

한국 전쟁 전에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소설루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112평의 대형 누각으로 1980년 봉선사 신도들의 조약돌모르기 불사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로 1층은 종무소겸 사무실로, 2층은 설법전으로 사용되며, 1층 통로에는 사천왕탱과 금강탱이 봉안되어 있다.

청풍루 외부는 사면에 걸쳐 4기의 편액이 걸려있다.

남쪽에는 청풍루, 북쪽에는 설법전, 서쪽에는 불천회관, 동쪽에는 중해운집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큰법당이 가려질 정도로 눈이 내린다.

 

 

 

어!

대웅전이 아니고 '큰법당'이네

보통 사찰에 가면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다는데...

 

 

 

 

 

 

 

 

큰법당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대중불교에 진력하신 운허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이름하였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석가모니 후불탱, 신중탱, 반자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3면 벽에는 한글 화엄경 동판 125매, 한문 법화경 동판 227매를 부착해 놓아 봉선사가 교학의 산실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관음전

원래 노전 스님이 머무는 노전채였는데,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후 정부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하여 관음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부에는 닫집을 갖춘 감실형의 불단에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

원래 어실각으로서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이다. 한국 전쟁때 전소된 후 정부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하여 지장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봉선사 전경

 

 

 

광릉택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광릉에 모셔진 세조때에 보한재 신숙주라는 대관이 있었다.

그는 일찌기 광릉자리를 신후지지(죽은 뒤에 묘지)로 정해 놓고, 은근히 초당까지 지어놓고 드나들었으니 지금 봉선사 서쪽 약 1km 떨어진 숙주암터가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이 소식이 세조에게 들어갔다. 그때까지 마땅한 신후지를 정하지 못했던 세조로서는 보한재의 신후지가 매우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달랠 수도 없는 형펀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지관 하나를 데리고 미복으로 사냥길을 떠나 이쪽으로 와서 살펴보니 매우 구미에 당기는 명당이었다.

그는 곧 이 근처에 유명한 지관이 있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곧 그를 찾아가 그로 하여금 감정을 해보게 할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이 지관을 찾아가는 도중 어느 길 모퉁이에서 묘를 쓰고 있는 일행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한 금정만 올려다 쓰면 매우 명당인데 지금 그 자리에다 묘를 쓰면 그날 하관 즉시에 꼭 상주가 급살할 자리였다.

깜짝 놀란 세조 일행은 첮째 미구에 다가올 급살광경이 무서웠고, 또 하나는 어느놈의 지관이 이렇게 자리를 잡았을까? 모르고 그랬다면 모르면서 아는체 한 죄가 크가 알면서도 그랬다면 천기를 희롱한 죄가 죽여 마땅할 것 같았다.

그러나 상주가 급살당할 시간은 다가오고, 상가에는 겁보리 한되도 없이 이장할 능력이 없다니 어쩌라?

그래서 이생원(세조)은 선심쓰기로 겉보리 3말 값을 주어 이장케 하고는 그 유명한 지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알고 그랬다면 엄벌해야 되겠고, 모르고 그랬다면 꼭 엄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행이 그 집에 갔을 때는 일모 주인은 나뭇짐을 지고와 마당에다 꽝하고 부리고는 손님에게 개의치 않고 부엌에 가서 냉수 한 그릇을 떠다가 시원스리 마시고나서야 나그네에게 다가오며, 어디서 오셨소 한다.

나그네 일행은 불쾌히 그지 없었다.

이 죽일놈의 영감쟁이 맛좀봐라 하는 생각으로 주인장, 저기 산비탈에 오늘 장사 지내는데 그 택지를 하셨다지요?

예, 그랬소

왜 한 금정만 올려다 썼으면 금시발복을 할 터인데 지금 그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까?

그 자리는 하관시에 상주가 즉사 할 곳인줄 아셨소? 모르셨소? 지관의 양심이 그래서야 되겠소이까 하고 자못 위협조로 나무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앗다 그 사람들 , 아직 젊은 양반들인데 다행히 지서는 좀 읽은 것 같아 대견스러우니 아직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군

암 그자리는 그날 신시에 상주가 급살 당할 자리고, 그 윗자리가 금시발복할 자리인것만은 분명하나 저기 저기 산세를 보면 겉보리 3말을 공짜로 얻어 먹고 써야 효력이 나게 되었고, 오늘은 꼭 겉보리 3말이 공짜로 생기게 될 줄은 몰랐군, 차분히 공부 좀 더 하시게 라고 말한다.

아차, 일행은 깜짝 놀라 땅에 부복하여 사과하고 문제의 땅을 보이니 과연 대지라 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신숙수 선생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이 땅을 세조의 신후지지로 천거하고 자신은 다시 별내면 고산리로 옮겨 정했다고 한다.

 

 

 

 

승려들의 과거장이었던 봉선사.

 

 

 

 

 

눈내리는 봉선사를 구경하고 돌아가는 길

온 천지가 눈 세상이다.

주차장에서 차에 있는 눈을 털고 큰 길로 나가는 순간

아!

죽었다.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길에는 차량들이 눈속에 갇혀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눈길 운전은 무려 4시간에 걸쳐 인천 집에 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