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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여행] 속세를 떠나고 싶은 곳,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들꽃(野花) 2013. 3. 11. 11:48

[보은여행] 속세를 떠나고 싶은 곳,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속세, 세속이란 불교의 세계가 아닌 일반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속세를 떠나보자, 세속을 떠나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이치이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속세를 떠나보자.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가는 날

일년에 두 번, 추석명절과 설명절 다음 날 장모님을 모시고 보은의 속리산을 찾아간다.

올해도 설 다음 날

장모님을 모시고 집사람과 셋이서 길을 떠난다.

날은 차지만 햇살이 있어 따뜻한 봄기운을 차창밖 너머로 느껴본다.

겨울은 겨울, 그래도 날은 엄청차다.

 

중부고속도로 서청주IC로 들어가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로 옮겨 길을 달려간다.

길을 가는 좌측으로 속리산의 위용을 느껴보지만 운전하는 관계로 감상은 금물, 잠깐 잠깐 주변 경치를 보며간다.

속리산 IC로 나와 고속도로 통행요금을 정산하고, 좌로 길을 잡아 선병국가옥을 끼고 우회전하여 길을 간다.

길을 가다보면 정이품송의 부인인 보은 서원리 소나무를 지나게 된다. 서원리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이다.

터널을 지나고 좌로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고 그렇게 길을 가면 말티재에서 넘어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조금 더 가다보면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보은 속리 정이품송을 만나게 된다. 예전의 아름다운 수형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세조와 관련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멋진 나무이다.

 

 

 

 

장모님이 거동하시기가 힘들어 차를 가지고 절 입구까지 들어간다.

신도증이 있어 그냥 패스한다. 아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입장료를 내고 한참을 걷게 된다.

장모님과 집사람이 다니는 절은 법주사 입구 좌측에 있는 수정암이다.

이곳은 비구니스님들이 있는 곳으로 나에게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절이다.

 

 

 

결혼 후 한동안 애기가 없을 때 겨울에 이곳 수정암을 찾은 적이 있다.

마침 스님께서 불공을 드려주신다고 하여 절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불공을 드린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해가 가기 전에 딸래미를 얻었으니 ~~~

 

 

 

절 마당 한편에는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다.

 

하늘은 맑고 공기가 시원하니 내 마음이 상쾌하니 기분이 좋다.

장모님과 집사람은 수정암 법당에 들어가고 나는 법주사를 둘러보러 걸음을 옮긴다.

 

 

 

저기 있는 커다란 바위 사이 눈이 치워져 있는 길을 따라가면 법주사의 너른 마당을 만나게 된다.

 

 

잠시 그 길을 접어두고 물가로 걸음을 옮긴다.

물에 비친 미륵대불의 모습과 잔잔히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

 

 

나무 사이에는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싸여있어 카메라를 든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눈이 있는 길을 걸어본다.

앞서간 숱한 발자국이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나의 흔적을 남기며 한발한발 걸음을 내딛는다.

 

속리산 법주사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어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나로서는 저절로 걸음이 그 앞으로 가게된다.

 

 

 

법주사 안내문 앞에 있는 벽암대사비와 속리산사실기비가 나란히 서 있다.

 

속리산사실기비는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7호)

비각 안에 있는 비로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우측에 있는 벽암대사비는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제 제71호)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눈 내린 길을 걸어 수정교를 건넌다.

 

 

수정교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알 수 없는 석조 부재들

 

 

수정교를 지나면 금강문을 만나게 된다.

 

차에서 내려 법주사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무엇을 비오리까?

간절한 마음 부처님께 통하여 원하시는 모든 것 이루시길 바랍니다.

 

소원성취 하세요.

 

 

금강문을 지나니 커다란 전나무(??)와 그 너머로 천왕문이 있고, 천왕문 지붕 위로 팔상전의 제일 위 건물이 살짝이 보인다.

좌측으로는 미륵대불이 늠름하게 서있고, 우측으로는 저 멀리 속리산이 법주사를 품에 안은듯 자리하고 있다.

 

속리산의 문장대

살아생전에 3번을 올라가야 한다는 데

나는 몇 번을 갔을까?

세 번은 간 것 같은데 복 많이 받을 것이다.

청주에서 대학 다닐 때 할머니와 고모 모시고 간 적이 있고, 회사에서, 집사람과 간 적이 있다.

 

오르고 싶은 산

언제나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산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 맘은 저 산으로 가고 있다.

 

 

 

 

 

법주사 사천왕문(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6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그 후 몇 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 2년(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1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은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하였다. 법주사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왕문 안에서 본 팔상전의 모습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 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기단부에서 상륜까지 약 24m)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부 사진을 찍을 수 없지만, 마침 스님의 불공드리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팔상전의 처마에 살짝이 서있는 미륵대불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법주사 사천왕 석등과 대웅보전 

 

 

 

원통보전과 미륵대불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대웅보전 앞의 나무 위에 앉아있는 까치

까치가 우니 좋은 일이 있으려나?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佛典) 중 하나이다.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제1517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미륵대불로 들어가는 입구

 

 

 

철솥에서 바라보는 법주사 전경

 

법주사 철솥(보물 제1413호)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보은 법주사 철솥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솥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눈 내린 법주사 전경

 

법주사 석련지(국보 제65호)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이 석련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제 제16호)

고려 공민왕이 법주사에 행차했을 때,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의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 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세워놓은 사리탑이다.

8각을 기본형태로 하여,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만든 것으로 전한다. 

 

볍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으로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눈내린 법주사의 전경 모습을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집사람에게서 전화가 온다.

점심공양을 먹으러 오라고

물론 갑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죠.

맛난 떡국으로 식사를 하고 다시 장모님을 모시고 법주사 구경을 나갑니다.

 

 

 

곱디 고우신 장모님

얼마 전 생신 때 집사람이 장만해 드린 한복을 입으신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으시는데

오늘은 기꺼이 응하시네요.

 

 

사위와도 찍으시고

 

 

집사람과도 사진을 찍습니다.

 

이제 길을 떠납니다.

눈내린 법주사의 풍경이 너무 좋아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어쩝니까?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다음을 기약하며

이곳을 가슴에 담아두고 길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