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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여행] 근로자의 날, 남양주의 왕릉을 찾아 떠난 길

들꽃(野花) 2013. 5. 26. 22:52

[남양주여행] 근로자의 날, 남양주의 왕릉을 찾아 떠난 길

 

조선왕릉

이성계가 고려를 망하게 하고 세운 나라, 조선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제1대 태조 이성계에서 부터 27대 순종까지 519년 동안 이어온 나라이다. 이렇게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극히 드문 유레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왕조에는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에는 왕릉이 9개 있어 그리 불리우고, 서삼릉, 서오릉 등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이다.

 

근로자의 날

모처럼 시간이 나서 그동안 서울에서 가깝지만 내가 사는 인천과 반대편인 남양주의 왕릉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먼저 남양주 금곡의 황제의 능인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 그리고 중요민속문화제 제130호 궁집, 그리고 안빈묘, 광해군묘, 성묘, 봉인사,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 등을 둘러보려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컫는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이다.

 

 

 

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과 유릉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

 

 

따뜻한 봄날의 홍유릉의 길을 걷는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어있는 길, 왕조의 퇴락을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왕인 고종과 순종

그들의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도심지에서 이렇게 잘 가꾸어있는 정원은 없을 것이다.

 

 

 

왕의 무덤인 만큼

왕릉 주변이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하게 있어 산책나온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홍릉과 유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고 있다.

 

 

 

파란하늘에 하이야 뭉게구름이 있어 최상의 날을 보여주고 있어 나들이 나온 나그네의 기분을 흥겹게 하고 있다.

 

 

 

홍릉의 재실

 

 

 

 

재실에서 바라본 홍릉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이므로 이전의 왕들처럼 정자각이 없고 침전을 두어 대신하게 하였으며 그 아래 문,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낙타 등을 배치하였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침전

 

 

 

 

순종의 무덤인 유릉으로 가는 길

 

 

유릉의 재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 유릉 역사문화관

 

 

 

다음으로 홍릉, 유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궁집을 찾아간다.

궁집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자 왕이 그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북한강변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궁집이라는 칭호는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생겼다.
궁집을 찾아갔으나 입구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공사중이라는 표지만 보고 돌아와야 했다.

 

 

궁집을 보지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안빈묘를 찾아 길을 떠난다.

예전에 이곳은 철도설계관련하여 골골이 찾아다녔던 기억이 있는 곳이라 안빈묘를 쉽게 찾을 것 같았으나 평내차량기지가 들어서면서 들어가는 길이 바뀌는 바람에 헛걸음을 한 끝에 겨우 찾아가게 되었다.

 

 

 

 

금곡역에서 사릉을 찾아가다보면 사릉 가기 직전 송능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길을 찾아야 한다.

하나 유의할 점은

안빈묘를 안내하는 그 어떤 이정표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송능삼거리에 거리만을 알려주는 작은 이정표만 있어 길을 찾는 수고를 좀 해야한다.

요즘이야 네비게이션이 있어 쉽게 찾겠지만 네비게이션이 없는 나는 지도를 여러번 본 끝에 겨우 찾게 되었다.

 

 

 

안빈묘는

사적 제366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이씨의 무덤이다. 안빈이씨는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나 숙종 19년(1693)에 죽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는 글이 새겨 있다.

 

 

 

 

사적 제366호 안빈묘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66

 

 

 

다음으로 찾은 광해군 묘다.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임금으로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는 행동을 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인조 19년(1641)에 사망했다. 처음엔 제주도에 묻혔다가 인조 21년(1643)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부인유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로 함께 유배를 갔다가 1623년 사망했다. 양주에 무덤을 모시고, 광해군이 죽은 후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사적 제363호 남양주 광해군묘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외

 

 

 

 

 

다음으로 성묘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성묘는 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며 광해군을 낳은 공빈김씨의 무덤이다. 공빈김씨는 명종 8년(1533)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선조 10년(1577)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죽기 전에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으므로 성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광해군묘가 있다.

 

성묘를 찾아가는 길

나중에 확인하였지만 지도상 추정하는 성묘 근처에서 성묘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확인할 수 없어 계곡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찾아가게 된 절

봉인사

근래에 지어진 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어떤 사찰인지 알 수 없어 대충 둘러보고 내려가려 했으나 보면 볼수록 끌리는 그 어떤것이 있어 결국은 카메라를 꺼내 절의 풍경을 담게 되었다.

 


 

 

봉인사는

조선 중기 광해군 때 부도암과 함께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충분한 문헌이 없어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사리탑중수기비에 새겨진 것을 보면

광해군 11년(1619)에 석가법인인 불사리가 중국을 거쳐 이 땅에 온 것을 이듬해 천마산 봉인사로 보내어 동쪽으로 2백보의 위치에 탑을 세워 봉안하고 법당을 따로 지어 이를 수호 예불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봉인사는 부도암 이전에 이미 있었던 절이라 추측되지만, 봉인사라는 명칭이 법인을 받드는 절, 즉 부처의 사리를 모신 절이라는 뜻으로 본다면 사리탑을 세우고 부도암을 지을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성묘를 찾으로 봉인사까지 올라왔다.

누군가 이야기 한 것이 생각난다.

인연이 있으니 내가 여기에 있다는 말

그렇다.

내게 인연이 없다면 오늘 이 순간 내가 여기까지 왔겠는가.

이것도 인연이다.

 

 

 

 

 

 

광해군 12년(1620) 왕세자의 수복무강을 위해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되어 원당인 봉인사의 부도암에 사리탑이 봉안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화재로 이 사찰의 불전들은 소진되었고, 사리탑만 남아 있다가 일제 때 일본으로 반출되어 오사카시립미술관에 세워져 있었다.

그후 1987년 소유자인 이와타센소의 자발적인 기증반환으로 사리함, 중수비와 함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복원 전시되고 있다.

 

 

 

종무소 옆에 있는 그냥 찻집

왠지 오늘은 저기서 차를 한잔 마시고 싶다.

 

손님이 나 혼자라

어떤 차를 좋으냐고 여쭈니

개똥쑥차가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 

 

그냥 찾집

꽃으로 가득한 실내에 은은히 들려오는 불경소리가 어우러져

나그네의 발걸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개똥쑥차

한잔 마신다.

오늘의 인연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서 차를 마신다.

즐거운 인연이다.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 '사릉'이다.

남양주 사릉, 사적 제209호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사능리)

 

 

 

사릉은조선 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함에 부왕(夫王)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해주정씨가(鄭氏家)의 묘역에 장례하였으며, 봉사(奉祀)도 정씨가에서 하여왔다.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