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의 문화재답사/사적

[공주여행] 동학농민군의 최대의 격전지,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우금치 고개에서 그날의 함성을 들리는듯 하다.

들꽃(野花) 2013. 12. 25. 10:38

[공주여행] 동학농민군의 최대의 격전지,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우금치 고개에서 그날의 함성을 들리는듯 하다.

 

 

공주 우금치 전적 (公州 牛禁峙 戰蹟) / 사적 제387호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학동 산78-1외

 

 

공주여행에서의 1박 2일 여행

백제의 고도, 웅진시대를 열었던 공주를 찾아 길을 나선다.

인천에서 공주로 달려온 나그네, 어제 공주의 새로운 맛의 브랜드인 '달곰나루' 를 사용하는 공주맛집과 공주중동성당, 재활용센터인 빈병이야기, 박동진 판소리전수관, 충남역사박물관 등을 보고 하룻밤을 유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날 아침

공주의 초겨울 아침은 매서운 바람은 없지만 금학생태공원까지의 길은 겨울의 쌀쌀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돌아왔다.

다음으로 찾은 곳

공주의 금학동에 소재하고 있는 우금치고개로 길을 잡는다.

바로 동학농민군의 최대의 격전지였던 우금치 전적지를 찾기위해서다.

처 외가가 있는 공주는 자주 왔었지만 우금치 전적지는 처음으로 찾는 것이다.

 

우금치 고개는 공주시 금학동에 소재하고 있는 고개로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우금치 고개는 공주와 부여를 잇는 40번 국도에서 태봉산아래 봉정교차로에서 공주시청으로 연결하는 도로가 고갯마루 아래를 통과하고 있다.

 

그 옛날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피의 항쟁을 아느지 모르는지 너르디 너른 고갯마루에 찬바람만이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동학혁명군 위령탑

 

 

약속!

약속이란 과연 무엇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것을 어찌 풀어야 하는가.

약속이 경중을 떠나서 약속이란 지켜야 하는것이다.

 

동학혁명 당시 정부와 체결된 전주확약이 지켜지지 않자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동학농민군은 논산에 머물며 공주를 첫 번째 주요 공격목표로 설정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의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소재하는 중부지역의 거점으로서 전략상 공주를 확보하는 것은 향후 전쟁의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우금치는 공주의 치소에서 부여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이며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약 3만을 헤아린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200명을 포함한 약 2,500명의 관군과 1894년 10월 23일부터 이인, 효포, 웅치에서의 싸움에 이어 11월 8일 드디어 우금치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농민군은 고개위로 진격하다가는 연합군의 일제사격에 겹겹이 쓰러져 고개로의 진격 후퇴를 무려 40~50차례를 거듭한 끝에 거의 전멸하였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이 고개의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졌으며,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다.

 

 

전봉준

1855(철종 6)∼1895(고종 32).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고부민란, 조병갑의 횡포에 의해 발생된 민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안핵사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그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 무장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확약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폐정개혁 12조

1.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정한다.

3.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채용에는 지발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4개항의 행동강령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4.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가.

언제적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나뒹그는 모습이 애처롭다.

내가 잘못 보았을까?

원래부터 저렇게 조성하여 놓았을까?

 

 

 

 

피를 토하며 죽었을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보는 듯 마음이 찡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것

동학혁명 위령탑 뒤에 자리하고 있다.

 

 

 

공주와 부여를 잇는 우금티터널

 

 

 

 

 

이 산하 어디엔가에 묻혀 있을 그날의 넋을 위로한다.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우금치 고갯마루에서 보는 공주

저 공주로 가기위해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했으니 그날이 아픔을 본보기로 새로운 나라, 보다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새야 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발톱 다 닳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휘여 휘여 휘여 휘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윗논에는 차나락 심고 아랫논엔 메나락 심고
울 오래비 장가갈 때 찰떡치고 메떡 칠걸
네가 왜 다 까먹느냐 네가 왜 다 까먹느냐

 

휘여 휘여 휘여 휘여 휘여 휘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새야 파랑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