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의 문화재답사/사적

[여주여행] 병자호란의 한을 품은 봉림대군, 불벌에 힘썼던 효종대왕, 여주의 영릉(寧陵)

들꽃(野花) 2015. 5. 15. 00:59

[여주여행] 병자호란의 한을 품은 봉림대군, 불벌에 힘썼던 효종대왕, 여주의 영릉(寧陵)

 

제27회 여주도자기축제

여주에는 지금 여주의 도자기를 세계에 널리알리는 2015 경기도자 세계도자비엔날레와 제27회 여주도자기축제가 열리고 있다. 여주도자기축제는 지난 4월 24일부터 5월 17일까지 열리고 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여주로 떠난 1박2일의 여행에서 먼저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먼저 둘러보고 도자기축제를 만나려고 한다. 

그래서 먼저 효종대왕의 영릉을 먼저 찾았다.

영릉에는 재실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고 재실안에 있는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세종대왕릉보다 먼저 찾은 것이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으로 바로 옆에는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과 함께 있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게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 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 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의 릉이다.

 

 

 

효종이 1659년(효종 10년) 6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에 능의 병풍석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홍살문 또는 홍전문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로 참도(참배하러 가는 길)라 하며 좌측의 높은 길은 신도라 불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신도로 출입을 하고 오른쪽의 약 15cm 낮은 어도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다.

 

 

 

배위(拜位)

홍살문 오른쪽에 있어 왕이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절을 하고 들어가는 곳이다.

수릉관, 헌관, 향축을 올리는 신하들이 이곳에서 사배를 올린 후 들어갔으며 나올 때도 사배를 드렸다.

능에 참례하는 신하들은 여기에서 망배(멀리 바라보고 절함)를 드렸다.

 

 

 

 

효종은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으로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머물렀다. 귀국후인 1645년 소현세자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후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향한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오히려 그들을 도와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1659년(효종 10)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정자각 너머로 능이 보인다. 우측에 있는 것은 왕비인 인선왕후의 능이고 뒤쪽 좌측에 있는 것은 왕의 능이다.

 

 

 

 

정자각(丁字閣)

제례 때 제물을 진설(차림)하고 제사를 드리던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T"자 모양을 하고 있어 한자의 "丁"와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東入西出,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예감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으로 제사가 끝난 뒤 철상(제사 음식을 치움)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왕릉의 봉분 주위에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릉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곡담이 없는 왕비의 능

 

 

 

 

 

 

 

영릉비(寧陵碑)

 

 

 

 

수북방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수복(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보물 제1532호 여주 효종영릉 재실

 

  재실(齋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로 1673년 현 위치로 천장을 할 때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제관이 머물려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왕의 국장 후 탈상 때까지 대군 등 자손과 문무백관이 매년 제사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제사를 준비하던 집이다.

 

 

 

천연기념물 제459호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회양목은 영릉(寧陵)의 재실안에 있으며 같은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회양목은 나무높이 4.7m, 가슴높이의 둘레 65cm(직경 21cm)이며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생한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 일 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    

 

 

 

 

 

 

 

찾아가는 곳

조선 제17대 효종-영릉(寧陵, 효종, 인선왕후)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