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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여행] 웅진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는 금강변의 공산성

들꽃(野花) 2014. 4. 24. 07:00

[공주여행] 웅진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는 금강변의 공산성

 

유유히 흐르는 금강

금강(웅진강)을 발아래 두고 백제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웅진 백제의 도읍지라 추정되는 공산성에 올라 그 옛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공산성은

공주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누구나 잠시 쉬어 갈 수 있어 좋은 곳입니다.

내가 사는 인천에 이리 가까이 편안한 휴식처가 있다면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즐기고 싶습니다만 인천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공주사람들은 복 받은 것 같습니다.

공산성하면 백제의 웅진시대의 수도가 있던 곳이랍니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지역을 다스렸던 백제, 고구려 신라와 함께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뤘던 백제의 드높은 기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B.C 18 ~ A.D 475년 동안의 한성시대를 마무리 하고 웅진시대(475 ~ 538), 사비시대(538 ~ 660)를 풍미했던 나라입니다.

고구려, 신라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웅장한 백제문화를 꽃피웠던 백제

22대 문주왕부터 26대 성왕 16년까지 64년간 백제의 한페이지를 장식했던 웅진시대의 왕궁터라 추정되는 공산성을 둘러보려 합니다.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웅진(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입니다. 공산성은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습니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으며 지금은 공산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공산성 금서루 아래의 비탈면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영산홍(철쭉이라고도 함)이 흐린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회색빛 돌사이로 화려한 꽃을 보니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성곽과 비석들, 그리고 그 가운데 붉은 색의 꽃들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그네의 발길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나그네

그래서 인터넷에서의 닉네임이 들꽃이라 했습니다.

들꽃, 들에 피는 꽃

괜찮지 않습니까?

꽃을 좋아하는 것에 더하여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다니는 멋드러진 나그네입니다.

 

 

 

금서루 입구에는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공주와 관련된 인물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와 제민천교 영세비 등 47기가 있습니다.

많은 비석중에 특별한 비석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제민천교 영세비'

비에는 1817년 여름 공주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 쌍은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업 자금의 조달 방법 및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면의 일반 백성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단체 견학을 온 학생들이 공산성 금서루 아래에 모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네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켜주어 자신들이 자라는 나라에 대한 뿌리를 찾는 답사여행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

일반적인 성의 문은 아치형이 많은 데 이곳은 특이하게 사각의 철제로 아래를 받치고 그 위에 성곽을 쌓았습니다.

아마도 복원하면서 뭔가 잘못된것 같습니다.

 

 

 

 

 

저 멀리 나즈막한 야산이 보입니다.

제 눈에는 한번에 보이지만 여러분들은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도심지의 건물너머로 나즈막한 산줄기가 보이죠. 그 산줄기의 오른쪽 끝이 바로 무령왕릉과 관련있는 사적 제474호로 지정된 정지산 유적입니다.

 

정지산유적은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의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유적으로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국가적 차원의 제의시설로 추정되며, 이 유적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이 사후 무령왕릉에 안치되기까지 2~3여 년간 수습되어 보관된 곳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유적지입니다.

 

 

 

사적 제12호 공주 공산성

공산성의 성의 둘레는 2,450m 동서로 약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습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공산성은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입니다.

 

 

 

저 멀리 흐릿하니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황새바위 천주교 성지가 살며시 보입니다.

황새바위 천주교순교유적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충청도 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유적지입니다. 공주 감영 또는 우영에 체포된 교인들은 현 교동성당 인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도 이곳에서 참수되었으며,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 164인에 이른다고 합니다. 1980년 황새바위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천주교단에서 부지를 매입하였고, 1985년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새긴 무덤경당 및 순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나그네의 생각에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가 봅니다.


 

 

 

한적하니 걷기 좋은 성곽길을 한손에 카메라를 들고 걸어갑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멋드러진 벚꽃이 피었을 넓디 너른 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이 웅진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사람들이 저 멀리 무리지어 연못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로 걸음을 옮겨봅니다.

 

 

 

이곳은 문주왕 1년(475)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면(성왕 16)에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입니다.

 

 

공산성은 64년간의 백제의 수도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장수왕의 3만여명의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다 개로왕까지 살해되는 패전끝에 한성을 내주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지금의 공주에 이르러 성을 쌓고 백제의 부흥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이밖에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도 나당 연합군에 의해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했으며, 822년(신라 헌덕왕 14)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정안'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난을 일으켰던 김헌창도 마지막에 공산성에서 자결을 하였으며, 조선 인조도 이괄의 난때 반군들에 쫓겨 혼비백산 도망치다 난이 평정될 때까지 10여일 동안 몸을 숨긴곳이 또한 공산성이라고 합니다.

 

 

 

공산성내에 있는 우물터

 

 

 

쌍수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

쌍수정은 공산성 진남루 북서쪽에 있으며, 조선 영조 10년(1734)에 처음 세운 정자로,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공산성의 역사를 말해주듯 오래된 벚나무가 벚꽃잎을 떨어뜨리며 이 봄을 즐기고 있나봅니다.

 

 

 

 

엄마와 함께 답사를 나온 어린이들이 무리를 지어 연못을 구경하러 갑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쌍수정 사적비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 비입니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 일반적인 양식으로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습니다.
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로,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습니다.

 

 

공주의 진남루가 숲너머로 보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답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2,450m나 되는 공산성 성곽길을 걸으며 공주시내와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이밖에도 성내에 영은사가 있고, 공복루, 광복루, 연지, 명국삼장비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어 꼼꼼하게 살펴보며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주 공산성안 성안마을에서 645년 제작됐다고 명시된 최고의 옻칠 가죽갑옷이 출토되었다는 기사가 있어 적어봅니다.

 

 

 

 

 

 

 

찾아가는 곳

공산성

충남 공주시 금성동 65-3(공주시 웅진로 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