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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여행] 서남해의 주요거점인 목포의 해상을 지켜온 목포진지(목포진 역사공원)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들꽃(野花) 2015. 4. 28. 01:06

[목포여행] 서남해의 주요거점인 목포의 해상을 지켜온 목포진지(목포진 역사공원)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유달산꽃축제가 열리는 날 나그네는 목포진(木浦鎭)을 찾는다.

목포를 여러번 찾아왔으나 목포진의 유적은 개항과 함께 폐진되어서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포진지를 찾는 것을 포기하였으나 목포시가 2014년에 고증을 거쳐 목포진의 일부를 복원하여서 이번 목포에서의 1박2일 여행길에 그 현장을 찾았다.

목포지역은 유달산이 해발 228m로 그리 높지 않은 지역이라 만호동에 있는 목포진지도 그리 높지 않을 거라 생각하였으나 길가에서 새로이 복원된 목포진지까지는 경사가 꽤 급한편이다.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르며, 진의 우두머리인 종 4품의 무관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목포는 지리상으로 볼 때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과 경상남부 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목포는 조선초기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목포진 역사공원으로 타시 태어난 목포진지를 둘러본다.

 

목포진은 조선 세종 15년(1433)에 목포병선(전쟁에 쓰는 배)을 황원(현재 해남) 주량으로 옮기고, 세종 21년(1439) 처음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 되었으며, 성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연산군 8년(1502)으로 전해진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둘레 1,306척(1척=30.30cm, 395.72m), 높이 7척 3촌(1촌=3.0303cm, 2.21m)이었으며,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다고 한다. 목포진에는 만호(무관 종4품) 1인 외에 군관 6인, 진무 7인, 사부 2인, 사령 5인의 관호이 있었으며, 만호는 인근지역의 해상 경계 경비 등 병사업무의 수행과 진영 소재지의 인근 마을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하였다.

 

그후 고종 32년(1895)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되었다.

 

 

 

 

2014년 목포진유적비만이 남아있던 것을 새로이 복원한 목포진 역사공원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듯 새로이 복원된 목포진의 둘레에는 깃발들이 목포의 바닷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목포진 역사공원 안내도와 홍살문이 서 있으며 홍살문 너머로 내삼문과 객사가 복원되어 있다.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붉은 화살문이라는 뜻의 홍살문, 또는 홍전문, 홍문이라는 문이 서 있다.

홍살문 뒤에는 객사로 들어가는 객사문이 있으며 삼문으로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분된다. 삼문 중 가운데칸은 어칸으로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않고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하여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오게 된다.

 

 

 

 

목포진 역사공원 배치도, 목포진 추정 조감도, 1930년대 목포진 전경의 안내를 통해 당시의 목포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30년대 유달산에서 목포진 유적지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에서 당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1872년 제작된 무안목포진고지도

지도에 목포진은 원형으로 둘러져 있고 동·서·남·북 네 곳에 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내에는 객사, 내아, 군기고, 사령청, 장청, 이청, 창고, 중문, 내삼문(2동), 홍살문, 옥, 그리고 성박 남문과 동문사이 어변정이 있다.

 

 

 

 

'목포지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객사건물

고려,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안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하는 한편, 관찰사 순행시는 집무실로, 사신과 관리들에겐 숙소 및 접대장소로 이용된 공간이다.

 

 

 

목포진에 근무했던 만호들의 선정비로 목포진 역사공원이 복원되기 전에는 구 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목포 근대역사관) 건물에 딸린 주차장에 있었는데 이번에 이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객사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가 모셔져 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향망궐배가 행해지던 곳이다.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에 폐진되었으므로 당시의 성이나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복원에 사용하였던 돌들은 만호동 일대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사용되었던 돌이라고 한다.

 

 

 

만호진의 성은 일본영사관, 영국 영사관 기지로 사용되다가 민가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커다란 바위너머로 신령이 머물다간다는 유달산이 보인다.

 

 

 

 

 

 

 

 

이곳이 목포진지였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목포진 유적비가 안내판 뒤에 외로이 서있다.

왜 '목포진유적' 비가 안내판 뒤에 숨겨져 있는지 안내판을 뒤로 물리고 비를 앞으로 옮겨 설치했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남는다.

 

 

 

찾아가는 곳

목포진지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주소 : 전라남도 목포시 만호동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