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여행

[용인여행] 하여가/단심가로 충절의 뜻을 밝힌 정몽주 선생이 잠들어 계신곳, 정몽주 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호

들꽃(野花) 2015. 5. 26. 19:03

[용인여행] 하여가/단심가로 충절의 뜻을 밝힌 정몽주 선생이 잠들어 계신곳, 정몽주 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호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는 충절의 뜻을 밝힌 정몽주 선생

그러나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개경(개성)의 선죽교에서 피살된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용인 모현면 능곡리 야산에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어 용인여행길에 찾아본다.

포은 정몽주(1337 ~ 1392) 선생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말 삼은으로 불린다.

정몽주 선생의 출생은 경북 영천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할 때 장례행렬이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정몽주 선생묘는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선생의 묘는 단분으로 묘비, 문인석, 상석, 곡담 등은 종전의 것이 남아 있었으나 1972년 문화재로 지정된 후 상석이 지금의 것으로 교체되고 1974년에 곡담을 보수하면서 장명등, 망주석, 석양, 호석, 난간석, 그리고 새로운 문인석 1쌍이 추가 설치되었다.  1980년에는 묘역 안에 있던 민가 3채를 이전하였으며 신도비각, 재실 등을 조성하였다.

 

 

 

 

정몽주 선생은 본관은 영일, 출생지는 영천으로, 초명은 몽란, 또는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으로 충숙왕 6년(1337)에  추밀원지주사 습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이다. 어머니 이씨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 후에 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몽주라 고쳤다.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로 가는 길

 

 

 

묘역입구 좌측에 있는 신도비각

 

 

 

신도비는 송시열이 지었으며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로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정몽주 선생 묘역 안내도

 

 

 

홍살문

 

 

 

경모사

 

 

 

경모사와 모현당, 그리고 재실

정몽주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 용인시 모현면인데 모현면인 이유가 '모현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모현(慕賢)은 정몽주를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 감시(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작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 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해 개경을 수복하고서도 김용의 음모로 효수되자 그의 문하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에 병마사 이성계와 함게 여진토벌에 참가하였으며 당시 상제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내렸다.

 

 

 

1372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해메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1376년(우왕 2)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인임·지윤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 조정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지정조격』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오른팔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살해되었다.

 

 

 

 

 

하여가(이방원)

此亦何如彼亦何如(차역하여피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떨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럼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정몽주)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혼백유무야)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향주일편단심유개리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백로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포은 정몽주 선생 어머니 지음)

 

 

 

 

정몽주 선생 묘역 오른쪽에 있는 저현 이석형선생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저현 이석형(1415∼1477)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3년(1441)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동헌에 남겼는데, 다른 관리들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막아주었다. 그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는『대학연의』,『대학연의집략』,『저헌집』등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 묘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

 

 

 

임고서원

 

 

 

 

정몽주 선생의 묘소는 풍수지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지형을 공부하러 올 정도로 유명한 명당자리이다.

 

 

 

  정몽주 선생은 1401년(태종 1) 권근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될 때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포은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선현들의 지고한 정신문화를 계승하며 용인 600년을 홍보하고 부각시킴으로서 용인의 자긍심을 북돋음하고 축제를 통해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아름다운 문화도시의 이미지 창출을 하기 위해 포은문화재가 용인문화원 주최로 열린다.

 

 

 

 

 

 

 

 

 

 

연안이씨 묘역

 

 

 

 

인근에 정몽주선생의 덕망과 충절을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렬서원이 있어 정몽주선생 묘역과 연계해서 둘러봄이 좋을것 같다. 충렬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졌으며 정몽주의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함께 사액서원이 되었다.

충렬서원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 (모현면 능원리 118번지)

 

 

 

찾아가는 곳

정몽주선생묘 -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능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