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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여행/부안여행]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도학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정기 진작한 전우 선생 -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간재선생유지

들꽃(野花) 2015. 5. 29. 10:07

[새만금여행/부안여행]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도학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정기 진작한 전우 선생 -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간재선생유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간재선생유지

 

새만금으로 떠난 여행은 군산 근대화거리의 빈해원에서의 점심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진포해양공원에서 고려말 왜구의 적선 500여척을 화포를 이용하여 불살라버린 현장을 둘러보고, 근대미술관, 근대건축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보고 세계에서 제일 긴 33.9km의 새만금 방조제 한 가운데 있는 아리울예술창고에서 화려한 아리울스토리 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일몰과 일출의 출사지로 유명한 계화도의 계화교에서 일출을 사진에 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계화교에서 일출을 담는 장면을 한낮에 사진에 담으며 주변을 살펴보니 '간재선생유지 1.2km'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어 거리도 가깝고 문화재를 찾는 것이 취미인 나그네의 발길을 유혹하기에 그리로 발길을 돌린다.

 

간재선생유지가 있는 곳은 부안군 계화면 양지마을로 찾아가니 마침 시간이 계화도의 산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역광으로 비치는 시간이라 사진찍기가 좀 불편하다.

 

간재선생유지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전우(1841 ~ 1922)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1910년 국권이 일제에 강탈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계화도로 들어와 1922년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도학을 가르치고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정기를 진작하는데 일생을 바친 곳이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간재선생유지

 

 

 

계화도의 일출 포인트

새만금을 둘러보는 여행길에 찾은 계화도의 일출포인트는 나그네를 부르는 것 같다.

유채꽃 바람에 흔들거리며 솔숲사이로 떠올랐을 일출의 멋진 장면을 그려본다.

 

 

 

계화보건진료소 앞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에 '간재선생유지'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간재선생유지 까지의 거리가 1.2km라 그리 멀지 않아 계화도의 일출과 연계하면 좋을 것 같아 찾아간다.

 

 

 

간재선생을 배향한 계양사가 있는 곳은 양지마을로 양지마을은 예전에 광당(光堂)이라 불려왔으나 구한말 간재선생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시면서 양지로 불려졌으며, 마을에는 간재선생 사당 계양사가 있으며 대합, 왕새우 등 해산물 거래거 성시를 이루었던 큰 포구였으나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인해 자그마한 포구만이 있는 마을이다.

 

 

 

 

부안새만금마실길이 통과하는 양지마을

저 길 안쪽에 간재선생의 사당인 계양사가 있다.

 

 

 

간재선생 사당인 계양사

계양사는 전우가 죽은 지 11년 뒤인 1933년에 제자들이 계양사라는 사우를 지어 전우를 향사하고 있는 곳이다.

 

 

 

 

 

 

계양사에서 보는 외삼문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3칸, 측면 2칸, 지붕형식이 맞배지붕인 계양사가 자리잡고 있다. 건물안에는 전우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그의 묘소는 익산에 있으며, 계화도의 계양사, 의령의 의산사, 고창의 용암사, 정읍의 태산사 등에 제향되었다.

 

 

 

 

간재는 전주출신, 본관은 담양, 초명은 경륜, 경길, 자는 자명, 호는 구산·추담·간재이며 간재선생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인 임헌회의 문화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았다.

 

전우는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신봉하였고 한일합병에 통분하여 1910년부터 1922년까지 계화도에 들어와 후배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고, 또한 파리장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간재선생이 학생들과 학문을 토론하면서 강당으로 쓰던 건물인 계화재

전우는 계화도(界火島)를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러 중화의 유학을 계승하려는 뜻을 밝혔으므로 재의 이름도 그에 따른 것이다.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추담별집>의 내용

 

 

 

 

너르디 너른 간척지가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인해 물이 빠진 육지화가 되어 가고 있다.

머지않아 새만금 개발이 끝나면 이곳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양지마을의 간재선생의 유지를 찾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보게된 삼백초다.

 

 

 

 

 

저 멀리 커다란 비가 눈에 들어온다.

저곳은 청풍대라는 곳으로 비에는 간재선생의 숭고한 생애를 기리는 '中流砥柱 百世淸風(중류지주 백세청풍)' 글이 윤용구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계화도의 일출출사지와 간재선생의 유지를 연계한 부안새만금마실길을 둘러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새만금방조제 아리울예술창고에서의 아리울스토리 공연을 관람하고 새만금홍보관, 신시광장, 고군산군도, 비응항, 군산근대화거리 등을 연계한 볼거리, 먹거리 등과 함께하면 멋진 여행이 될 것 같다.

 

 

 

찾아가는 곳

 

간재선생유지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8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