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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여행]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적었으며, 당대 8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저헌 이석형-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들꽃(野花) 2015. 5. 29. 22:50

[용인여행]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적었으며, 당대 8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저헌 이석형-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용인에는 특별한 만남을 기다리는 곳이 있다. 고려말 삼은의 한분이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와 세종에서 성종임금까지의 당대 8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저헌 이석형의 묘와 신도비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리 문수산 자락에 함께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말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을 당시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와 함께 새로운 왕조를 이루고자 할때 서로들 나눈 시가 전하고 있다.

이방원이  "이런들 어떨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럼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의 하여가를 지어 정몽주에게 보내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으로 답가를 한 단심가로 유명하다. 고려말의 충신인 정몽주가 잠든 곳에 바로 좌측(묘를 등지고 보았을 때)에 저헌 이석형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용인에서의 정몽주 선생의 묘역을 찾는이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저헌 이석형의 묘와 신도비를 찾고자 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 왔다가 함께 있는 묘를 보고 아~~ 하며 찾아보게 되는 것이 저헌 이석형의 묘와 신도비가 아닐까 한다. 나그네도 경기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가 옆에 있는 저헌 이석형의 묘와 신도비가 있음을 알았으니 말이다.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

 

 

저헌 이석형 선생의 신도비

 

저헌 이석형

이석형은 본관은 연안, 자는 백옥, 호는 저헌이며 증조부는 사복시정 이광이고 할아버지는 임천부사 이종무이다. 아버지는 증좌의정 이회림이며, 어머니는 박언의 딸이다. 부인은 연일정씨로 감찰 정보의 딸이다.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이며 아들은 증이조판서 이혼이다.

 

 

연안이씨 비각공원

 

연안이씨의 시조 이무는 원래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고종 때 중량장을 지낸 인물로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해 왔을 때 부장으로 따라왔다가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아 신라에 귀화, 연안(延安)으로 사적되어 연안후에 봉해짐으로써 연안 이씨의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연안이씨 비각공원의 중앙에 저헌 이석형 선생의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곳은 연일정씨의 선산으로 연안이씨의 저헌 이석형이 연일정씨 선산에 들게 된 것은 이석형이 포은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정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딸이 1445년 아들 혼(渾)을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중에 사망하게 되었는 데 딸이 친정에서 죽자 정보가 자신의 사후의 신후지지로 정해놓은 곳에 딸의 묘를 쓰게 하였으며 후에 이석형이 죽자 정씨부인과 합장을 하게 되어 연일정씨의 선산에 들게 된것이라고 한다.

 

 

 

 

'연안이씨의 위상'이라는 비가 있어 잠시 살펴본다.

『세도와 부귀를 누렸다고 명문은 아니다. 흔히 명문을 말할때는 그 집안의 벼슬이나 세도보다는 학문과 도덕을 웃길로 친다. 그 점에서 이른바 연안이씨는 명문의 전형이다.』

 

비 아래쪽에 명문 연안이씨의 위상을 받침하는 조선 왕조실록의 기록에 남아있는 통계를 낸 것이다.

 - 대제학 :  총 132명중 8명으로 1位

 - 청백리 : 총 218명중 7명으로 1位

 - 문장가 : 총 81명중 5명으로 1位

 - 재상(장관) : 총 373명중 9명으로 8位(영의정 3명, 좌위정 6명, 판서 54명)

 

 

 

연안이씨 비각공원에는 1624년(인조 2)에 세운 저헌 이석형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전액은 김상용이 썼으며, 비문은 4대손인 월사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외6대손인 동양위 신익성이 썼다.

 

 

 

이석형은 필법이 신묘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최항 등과 더불어 당대 8대 문장으로 꼽혔다고 한다.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온유하고 즐거움을 좋아함을 '강(康)'이라 하였다.

 

 

 

신도비

 

 

 

 

홍살문

 

 

 

모현당과 재실

 

 

 

 

 

좌측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고 우측에는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있다.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

 

이석형 선생은 1441년(세종 23)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식년 문과에서도 장원으로 급제하는 등 삼장의 과거에서 거듭 장원을 하였다. 이에 사간원좌정언으로 특별히 제수받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집현전 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였다.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즉위하면서 전라도관찰서에 제수되었다. 1456년(세조 2) 6월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육신(六臣)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익산 동헌에서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었다.

 

이 일로 대간이 이석형을 치죄할 것을 상소했으나 세조는 묵살하고 오히려 예조참의에 봉하였다.

1460년(세조 6)에 세조의 특명으로 왕의 서계 지방 순행에 맞추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는데 세조가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부르기까지 하였다.

 

저서로는 저헌집, 편서에 역대병요, 치평요람, 정인지와 공저로 대학연의집략, 홍경손과 등이 있다.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 옆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인근 볼거리로는 충렬서원이 있어 이곳의 포은 정몽주 선생 묘와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와 신도비를 연계해서 살펴보는것도 좋을것이다.

 

 

찾아가는 곳

정몽주 선생 묘, 저헌 이석형 선생 묘 및 신도비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능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