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교동여행] 강화여행길에 찾은 교동 나들이, 교동향교, 교동읍성, 읍내리 비석군, 사신당지, 삼도수군통어영지
강화도 교동
교동하면 떠오르는 것은 조선의 제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이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연산군이 교동에서 죽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교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교동을 가는 창후리 선착장까지 몇번을 간적은 있지만 섬으로는 발길이 닿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엔가
교동을 들어가는 다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교동에 들어가기로 한다.
먼저 교동읍성을 찾고 교동향교와 화개사 갈림길에 있는 읍내리 비석군, 그리고 교동향교를 찾았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교동의 바다를 보고싶어 남산포 바닷가로 가서 사신당지, 삼도수군통어영지의 훈련장 및 배를 묶어 두었던 계류석을 보고 돌아왔다.
남산포 선착장
교동읍성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3호
교동읍성은 강화도 섬 외측의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에는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또한 문루와 성벽을 수리하였는데 공사를 끝내지 못하였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다.
성곽둘레도 430m라고 하는데 많이 훼손되어 남문인 유량루 근처와 반대편 부근당 부근에 성곽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좌측의 화개사, 우측의 향교의 갈림길에 있는 '읍내리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총 40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부터
강화군 및 교동유림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교동향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일주문을 용케 잘 통과하고 있는 굴삭기
그 옆에 '수령변장하마비'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하마비는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세운 비로
일반적은로 '대소인하마비'라고 세워져 있으나 교동향교에서는 '수령변장하마비'라고 새겨져 있다.
교동도의 제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령과 변장이다.
여기서 수령을 마을을 다시리는 사람이고, 변장은 군사의 우두머리이다.
즉, 교동도에서 제일 높은 수령과 변장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오라고 세운비이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 교동부사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인 화개산 남쪽기슭으로 옮겼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현재 향교에 남아있는 건물은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있고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으며 내삼문, 외산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노룡암
이 노룡암은 원래 교동현 동헌 북쪽뜰 층계 아래에 있었는데,
위에는 울창한 숲속에 늙은 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축단이 있었다.
정유 1717년(숙종 43년)에 충민공 이봉상이 노룡암이라고 3자를 지었는데,
그후 57년 계사 1773년(영조 49)에 그의 손자 달해가, 그 고적에다 글지은 것을 새기었다.
경진 1820년(순조 20)에 가서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쇄풍(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는 글제를 새기었다.
신묘 1831(순조31) 봄에 거듭 석대로 쌍아 있었던 것을 정묘 1987년 교동향교에 옮겨 놓았다.
대성전으로 가는 내삼문
대성전
고려 충렬왕 13년(1286)에 안향이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가지고 왔는데 고려에 당도하여 첫번째 배를 댄 곳인 교동도에 문묘를 세우고 화상을 봉안하였다.
이후 서울의 각 읍에 조상이나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했다고 한다.
대성전 안에는 5성(聖), 송조 2현 및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부근당 근처에서 바로본 화개산
부근당 근처에 남아있는 교동읍성의 흔적
부근당(扶芹堂)
부근당이란 도하(都下) 각 관부에 부군(附 붙을 부, 君 임금 군), 부근(付 줄 부, 根 뿌리 근)이라하여
작은 사우(祠宇)를 두고 여기에 지전(紙錢) 등을 걸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곳 부근당은 특이하게도 부근당(扶 도울 부, 芹 미나리 근, 堂 집 당)이라 하고 있다.
햇 미나리가 나면 제일 먼저 임금께 바친다는 뜻으로 헌근지성(獻芹之誠)이라 했으며, 헌근(獻芹)이라 하여
윗사람에게 물건을 선사할 때나 의견을 적어 마음을 표현할 때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
근(芹)이란 자를 쓰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미풍양속의 덕을 기리며 교동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연산군을 神으로 모시고 폐주가 죽은 섣달에 예를 갖추어 제를 지내며 원혼을 위로하고
겸손의 표현으로 유일하게 부근당(扶芹堂)이라 하였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어영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조선 인조 7년(1629)에 한성 방어를 위하여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인조 11년(1633)에는 3도(경기, 황해, 충청)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 서쪽 해안에다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 1기가 존재하고 있다.
사신당지로 올라가는 산길
사신당지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해로를 이용하여 배로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무사태평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당집이다.
해변 바위에는 징으로 쪼아 만든 층계가 아직도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한국전쟁때 당집이 없어졌던 것을 1969년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도수군통어영지의 흔적
배가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이다.
남산포 해안에서 마을 어르신이 가르켜 주어 찾게된 삼도수군통어영지의 계류석이다.
찾아가는 곳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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