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여행

전북 태조 이성계 역사탐방 - 남원의 황산대첩비,피바다.여원치마애불상

들꽃(野花) 2021. 10. 10. 07:04

왜구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우왕 6년 8월 왜선 500여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최소 25,000여 명의 대 병력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의 장군들로 하여금 최무선이 설계한 80여척의 병선과 역시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적을 소탕하였다.

  금강으로의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1380년 삼도도순찰사에 임명된 이성계는 남원에 도착한 후 교룡산성에서 군대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곳에서 남원과 지리산에 주둔한 왜구의 정세를 살피고 운봉 황산에서 10배의 적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황산대첩비는 선조 10년(1577) 운봉현감 박광옥에 의해 건립됐다. 1380년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돼새기기 위해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일본인에 의해 폭파됐다. 황산대첩비는 해방 이후 1957년 현 위치에 다시 건립됐고, 폭파된 비석은 파비각 안에 보호돼 있다.

 

 황산대첩비지는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었으며,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정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됐다.

 

 

 

 

 

 

 

 

어휘각

1380년 황산대첩을 거둔 이성계가 1년 후 남원을 다시 찾아 바위에 자신의 이름과 황산대첩에 참가한 8면의 장수, 4명의 종사관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하지만 어휘각은 1945년 1월 17일 새벽,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폭파되고 어휘는 정으로 쪼아 훼손하였다고 한다. 1973년 바위에 새긴 어휘를 보존하기 위해 어휘각을 세웠다.

이성계와 함께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8명의 장수는 도제찰서 변안열, 왕복명, 우인열, 도길부, 박임종, 홍인계, 임성미. 이원계이다.

인월 피바위

왜장 아지발도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며 심장에서 내뿜은 피는 목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뿜어져 내렸다. 바위에 벌겋게 피가 고이면서 순식간에 냇물을 피로 물들었다.

그 후로 바위를 깨면 붉은 색이 나온다고 하여 사람들이 피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피바위가 있는 지역은 인월이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은 날이 저물어 도망가는 왜구를 쫒아 달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싸워 전멸시킨 것이 유래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전투가 오래도록 이어져 날이 저물어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믐밤이라 적군과 아군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성계가 하늘을 우러러 "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 주소서"하고 간절이 기도를 드리자 잠시 후 보름달이 떠 천지가 개미 기어가는 것까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밝았다. 이때 이성계가 달을 끌어 올렸다고 하여 인월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여원치 마애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여원치 마애불상은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고개의 정상에 조금 못 미친 국도변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좌상이다.

  사각형에 가까운 넓직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으며, 옆으로 길게 찢어진 듯 한 눈과 양쪽으로 넓게 펴진 콧방울, 짧은 인중, 꾹 다문 각진 입 등에서 고려시대의 불상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여원치는 해발 고도가 450m로 지대가 높아 항상 운무가 자욱한 지역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출정한 이성계도 여원치 고개를 넘었다.

  이성계가 고개를 넘던 날은 안개가 짙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그 안개 속에서 한 할미가 나타나서는 왜구를 물리칠 방도를 일러주고 사라졌는데 거짓말처엄 안개가 걷히고 이성계는 그녀의 말을 따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후대 사람들은 그녀가 왜장 아지발도에게 젖가슴을 잡히는 희롱을 당하자 자신의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을 했다는 함양에 사는 얼굴 고왔던 여인의 원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고개의 이름이 여원치(女院峙)이다. 그녀의 흔적은 여원치 불상으로 남았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