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전나무 우거진 깊은 산 속에 봉황이 울었다고 하는 예천의 명봉사

들꽃(野花) 2011. 1. 15. 06:00

전나무 우거진 깊은 산 속에 봉황이 울었다고 하는 예천의 명봉사

 

예천읍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약 25분 정도 가면 소백산 자락 해발 500m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 명봉사(鳴鳳寺)가 나타난다.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깊은 산중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해서 명봉사로 불러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선계(仙界)에 든 듯 아름다운 숲을 가진 명봉사는 소백산맥 백운봉 아래서 깊은 고요함을 안고 있다. 하늘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목과 심산계곡을 돌아 나오는 맑은 물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삶의 갈증을 적셔준다.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정갈해서 평온한 느낌을 주는 도량이다. 지난 날 번창할 때의 명봉사의 규모는 수 천 칸이 넘는 매우 큰 절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는 보이지 않고 비구니 스님의 수행도량으로 남아있다.  

 

사찰 경내에 있는 문종대왕태실비와 고려 최초의 이두문자로 된 공문을 새긴 것으로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가 있다.

명봉사 뒤 내원암 암자로 오르는 숲길은 그냥 숲길이 아니다. 높은 성채를 이루고 있는 나무들과 이름 모를 새들, 이곳의 비경을 알고 찾아드는 발길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새로 만들어진 일주문에 [소백산명봉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제 속세를 떠나 절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울창한 나무 아래에 명봉사로 들어가는 콘크리트도로가 보인다.

그저 옛날의 그길을 바란다면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새로 만든 듯한 주차장

사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무량수전과 만든 지 오래되지 않은 탑이 있다.

 

절의 한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띄인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문종대왕태실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87호)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돌로 만든 방으로, 태실비는 태실에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이 비는 문종대왕의 태를 모신 후 세운 비로, 명봉사 절내에 사적비와 나란히 서 있다. 원래는 절 뒤편 산기슭에 있었으나 일제 때 태실을 발굴해간 뒤, 명봉사의 스님들에 의해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머리화 되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릿돌은 네모난 형태로, 앞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장면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거북받침의 표현이 투박하긴 하나, 짜임새와 조각솜씨는 섬세하다. 비의 앞뒷면에 새긴 비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영조 11년(1735)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좌측의 문종대왕 태실비와 우측의 명봉사 사적비

 

약사전

 

삼성각

 

 

보물을 찾으러 떠난 길

절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가 어디에 있는지 종무소에 물어보니 한분은 모르겠다고 하고 다른 한분은 삼성각 뒤쪽쯤 되니 삼성각 아랫쪽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을 알려준다.

그길로 들어가 조금 올라가니 앞의 사진과 같이 보호각이 보인다.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승려 자적선사(慈寂禪師, 882~939년)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로 선사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의 명으로 태조 24년(941)에 세운 탑비(塔碑)이다.

이 비의 음기(陰記)에는 10行의 음기가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도평성(都評省)에서 홍준화상(洪俊和尙:慈寂禪師) 중도(衆徒)의 우법사(右法師)에게 보낸 첩문(帖文)과 탑비의 조성과정에 관한 것이다.

특히 첩문은 이두문(吏讀文)으로 작성된 공문으로 고려 초기의 공문서의 양식과 당시 이두의 용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비문의 일부가 결락되어 있으나 비문의 중요 내용은 거의 파악이 가능하며 비의 형태 또한 귀부의 머리부분만 결손 되어 있을 뿐 그 잔여 부분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탑비의 주인공인 자적선사는 여주 고달원의 원감대사를 조사로 하고 그의 뒤를 이은 창원 봉림산문의 개산조 진경대사의 법통을 다시 이어 받음으로써 혜목산문 또는 봉림산문의 선맥을 고려시대까지 전승시킨 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탑비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 최언위가 짓고 비문의 서체는 중국의 명필 구양순의 필적을 집자하였으며 고려 최초의 이두문자까지 남아 있어 고려초기의 문장과 서예를 잘 보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고려초기의 불교사와 예술사 연구 및 국어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보물 제1648호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