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여행

[경주여행] 신라의 요석궁 자리에 앉은 경주의 교육기관 - 경주향교

들꽃(野花) 2012. 4. 2. 05:00

신라의 요석궁 자리에 앉은 경주의 교육기관 - 경주향교

 

경주하면 신라의 천년고도로 신라와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는 고도로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신라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즐비한 가운데 계림의 서쪽에 조선시대의 향교가 있다.

향교를 찾는 길은 첨성대의 앞에서 월성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계림이 나온다. 계림 앞에 있는 길을 이용하여 향교로 갈 수 있고, 계림 안으로 들어가 계림의 멋진 숲을 감상하면서 향교로 갈 수 있다.

향교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어 대성전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향교의 오른쪽 담벼락 끝 지점에 향교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려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뚜껑이 있는 우물같은 것이 있고 그 앞의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나온다.

보물로 지정된 대성전은 명륜당에서 건물의 뒷 모습만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경주향교 부지는 신라때 요석궁이 있던 곳이라 전해오며, 향교는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0도 가량 틀어져 앉아 있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가교육기관으로 이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 (1492)에 경주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0)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선조 37년(1604)에 부윤 윤성이 동·서무를, 광해군 6년(1614)에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건하였고, 이 때 제독청 전면에 연못과 작은 누대를 꾸몄다 한다. 효종 6년(1655)명륜당 북쪽에 송단(松壇)을 쌓고 현종 10년(1655)송단 동쪽에 존경각(尊經閣)을 신축하고 동,서무를 중수하였다. 이 때 부사(府使)민주면(閔周冕)이 유생과 상의하여 임해전(臨海殿)터에 있던 고 석물들을 가져다 과거에 없었던 계단과 정로(正路)를 만들었다고 한다. 

경주향교는 외삼문, 신삼문, 대성전, 명륜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문묘영역이 강학영역 앞쪽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고,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대성전은 연혁이 분명하고, 공포와 창호 및 가구에 고식의 기법이 잘 남아 있으며, 대성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 묵서명을 통하여 대성전의 중건년대와 당시 참여한 장인등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크다.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으로 위엄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겹처마 맞배집이다.

이 향교는 경상북도 내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건물 배치는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의 표본이다.

 

문화재로는 경주향교 대성전이 보물 제1727호로 2011년 12월 2일 지정되었으며 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경주향교의 정무(외삼문)

 

향교의 우측 담벼락 끝에 향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저기 보이는 문을 통해 향교의 명륜당으로 들어올 수 있다.

 

 

커다란 돌로 만든 뚜껑이 덮혀있는 우물(?)

 

 

 

 

 

보물 제1727호 경주향교 대성전

 

명륜당

 

 

 

태극기와 삼강오륜이 이곳이 교육기관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주향교를 두번째 찾아오지만 그때도 지금도 대성전을 볼 수 없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