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도를 아십니까?
거제도에서의 1박 2일 여행에서 찾은 맹종죽테마파크의 앞 바다를 같이 여행온 사람들이 칠천도라고 한다.
칠천도!
임진왜란 당시 원균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왜놈들과 한바탕 싸움에서 12척을 빼고 수장당한곳이란 말인가?
조선이 왜놈과의 해전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곳
아!
저곳이구나.
지금은 칠천교가 완공되어 차량들이 쉼 없이 드나들고 그 바다는 칠천도의 아픔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고요하다.
칠천량해전
1597년(선조 30)에 발생한 정유재란 중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패한 해전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상우병사 배설이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가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물론 배설은 전장에서 후퇴하였다고 후에 참수당하고 만다.
그 역사속으로 잠시 들어가본다.
칠천량해전(다음 백과사전의 내용을 옮겨 적는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에 조선을 재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 이에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으로 벌한 뒤 급히 한산도 본영으로 돌려보냈다.
본영에 돌아온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하기 위해 3도수군의 전선 160여 척을 다 출동시켰다. 그런데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다. 게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도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군은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5일 밤에 도도·와키자키·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었다. 원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접전했으며, 경상우병사 배설은 전세를 보고 있다가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갔다. 원균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도망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죽은 조선 수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해전으로 3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전사했다. 이로써 조선의 3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진주로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흩어진 병력과 배를 수집·점검할 것을 명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3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충청수사로 권준(權俊)을 기용했으며 뒤이어 전라우수사에 김억추(金億秋)를 임명했다.
칠천교 너머의 바다
칠천교를 넘어가면서 차안에서 보는 칠천도 앞바다.
칠천량 해전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는바다,
너무나 고요하다.
칠천교의 중앙 모습을 담는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칠천교로 들어가는 길 좌우에 벚꽃들이 한창 물오른듯 피어나고 있다.
서항마을에서 보는 칠천도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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