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여행

[공주여행] 충남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소론의 영수 윤증선생 가계의 일대기

들꽃(野花) 2012. 5. 23. 09:46

충청남도역사박물관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을 찾아간다.

이번 여행은 충남 기호 유학의 명재 윤증선생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충청남도역사박물관, 기호유교문화, 기호유학의 흐름, 특성, 명재 윤증선생의 일생과 명재고택, 전통과 예절 등을 알아보기 위한 여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번째로 찾아간 곳이 공주시에 있는 충청남도역사박물관으로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은 충청남도에서 출연한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속한 박물관으로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바로 세워 역사 ·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충남도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2006년 9월 28일에 개관하였다.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의

시설과 규모는 부지 13,645㎡, 전시실은 1층 기획전시실과 2층 상설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물관 소장유물 현황으로는 명재'윤증 초상' 5점 및 영당기적(보물 제1495호), '윤증가의 유품'54점(중요민속자료 제22호), '공주 상세동 산신도' 1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9호), '무안박씨 요여' 1점(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0호) 등 54,907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국고개길 24

전화번호 : 041-856-8608

홈페이지 : http://www.cihc.or.kr/museum/index.jsp

 

오늘은 그 첫번째로 1층 기획실에 전시되어 있는 윤증선생관련 유물들을 살펴보려 한다.

 

 

충청남도역사박물관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는 성황당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소망을 적은 종이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명재 윤증 선생관련 내용을 설명을 해주시는 오석민 역사박불관 관장님

 

 

전시실 내부

 

 

 

우계 성혼과 팔송 윤황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글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기호학파(율곡학파, 이이)

우계학파-조광조의 문인인 청송 성수침(성혼의 부친)과 성수종(숙부)으로 시작하여 우계 성혼으로 이어지는 파

성혼의 문인으로 윤황, 황신, 이항복, 김상용, 이정구, 신흠, 이귀, 정엽, 조헌, 안방준, 김덕령 등

팔송 윤황(성혼의 막내딸과 혼인)

우계학파->파평윤문으로 계승

윤황-윤선거-윤증으로 학통 계승

윤증의 문화에 박태보, 한영기, 정제두, 권이징 등이 있어 조선 후기에 '소론파' 형성

 

 

 

 

 청송 성수침의 유필로

5언율시 둥근달, 눈, 주중만설유회, 매우, 주야희우 등 9수가 실려있다.

 

 

팔송봉사

팔송 윤황(윤증의 조부)의 시문집

 

 

윤선거(윤증의 부친)

자는 길보, 호는 미촌, 노서, 산천재로, 아버지는 윤황, 어머니는 창녕 성씨로 성혼의 딸이다.

윤선거는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김장생, 김집의 문인이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과 친밀한 교유를 하였으며

남인계열의 권시, 윤휴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윤선거의 처 공주이씨는 이장백의 딸로

병자호란 당시 공주이씨는 윤선거와 함께 강화도에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에 의해 강화도가 점령당하자되자

'적의 칼날에 죽느니 미리 자결하겠습니다'하고 목숨을 끊었다.

이후 공주이씨는 1681년(숙종 7)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가례원류

유계와 윤선거가 가례에 관한 여러 글을 분류하여 정리한 책이다.

현재 유계본 가례원류와 윤선거본 가례원류 2종이 전한다.

이 가례원류는 유계의 수필본 가례원류에 윤선거가 정리한 것을 아들 윤증과 족현손 윤광소가 직접 증보한 필사 초고본이다.

 

 

 

명재 윤증의 향촌활동

윤증은 1676년(49세)에 처음으로 니산의 유봉에 거처하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 주로 머물러 있으며

문중사업과 강학 활동에 힘을 쏟는다.

문중의 일을 살펴보면

 

윤순거는 1643년 종회를 창설하고

1645년 종약을 제정하였으며,

1647년에는 종학당의 초대 사장(師長)으로 취임하여 종학당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윤증은

1668년에 종학당의 2대 사장이 되어 문중자제의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발전시켰다.

 

윤증의 강학활동은

부친 윤선거가 활동했던 금산의 산천재와 1676년 유봉에 세운 유봉정사, 1679년에 지은 홍성의 경승재 등의 3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말년에는 유봉정사에 머물면서 문중자제의 교육기관인 종학당의 교육과 후진양성에 매진한다.

 

 

 

 

노성가법

윤증이 문중에서 전해지는 규약과 대소사에 필요한 서식 등을 총망라하여 정리한 책이다.

팔송 윤황이 자손들에게 남긴 가훈과 계제자서, 윤순거의 종약, 종회의 완의와 통문,

제례와 혼례, 상례의 순서를 기록한 홀기, 축문 서식 등이 실려있다.

 

월강록

파평윤씨 문중 서당인 종학당의 월별 교과 성적표

1896년부터 1903년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경서를 읽고 평가한 결과과 기록되어 있다.

학생의 이름과 시험과목, 결과, 사는 곳을 적었으며

강장과 참강, 유사의 이름도 함께 기록하였다.

 

 

 

 

'백의로 정승에 오르다.'

 

 

계본초

1683년 2월 윤증이 임금의 명에 의해 응할 만한 재주와 학식이 없고,

병 또한 더욱 깊어져 조정에 나아갈 수 없다고 숙종에게 올린 문서의 초본이다.

윤증은 이해 5월 거듭된 국왕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상언초

1699년 9월 윤증이 춘방(세자시강원)과 국자(성균관 대사성) 두 직임을 사양하면서 올린 글의 초본

 

 

 

윤증의 묘지명

윤증은 1714년(숙종 40) 1월 24일, 평소 거쳐하던 유봉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3월 19일 공주 향지산 백운동에 장사지냈고,

1746년(영조 8) 윤 3월에 니산 두사촌으로 이장하였다.

 

 

명재유고(윤증의 시문집)

 

유봉영당의 건립과 성격

윤증 문인들은 1711년 완성된 초상화를 윤증의 재종손인 윤동주의 집에 보관하다가

1716년 여름 윤증이 생전에 거쳐하던 유봉정사에 봉안하면서 이를 영당으로 삼았다.

유봉정사는

윤증이 48세 되던 해인 1676년 니산의 유봉에 새로 지은 거처이며, 1714년 세상을 떠난 곳이다.

 

 

명재 윤증선생의 유품들

(중요민속문화재 제22호)

 

혼천의(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

치미추(유상기가 윤증에게 보내준 빗자루)

쥘부채(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로 대나무와 한지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상투관, 빗,

살쩍밀이(뿔로 얇게 만든 것인데 망건을 쓸 때에 귀 옆머리를 망건 밑으로 밀어 넣을 때 사용했던 도구)

 

백화(백목화라고 하며 목이 긴 신으로 흰 무명천과 가죽으로 만들어 국상 중 예복을 입을 때 신었던 것)

청려장(명아주 줄기로 만든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

참배록(유봉영당을 방문하여 영당에 모셔져 있는 윤증의 초상을 뵙고 절하여 예를 표한 사람들의 명단을 책으로 엮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