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여행] 대관령 아래의 천년고찰, 선불교의 요람- 강릉 보현사
강릉의 보현사
천년고찰 선불교의 요람이라 찾은 보현사
지도를 펴 놓고 보니 대관령아래 깊숙히 자리잡은 절이다.
네비 없이 전국을 다니는 여행이라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고 찾아간다.
하나 지도와 현실과는 동떨어지기 마련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어디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차에서 보이는 부분까지 가고 그런식으로 반복하다보니 절에 있는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차장도 상당히 넓어 괜한 걱정을 한 것이었다.
보현사는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보광리 산 544번지
과거의 주소이고 현재는 성산면 보현길 396, 보현사 (보광리)
보현산에 자리한 통일신라 때 창건된 고찰로 지금은 폐사지가 된 굴산사와 더불어 9세기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손꼽는 선종 사찰이었다.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현재 보물로 지정된 낭원대사탑과 탑비, 그리고 대웅전을 통해 당시의 융성했던 사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보현사의 창건 이야기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이른바 4대보살 가운데 한 분인 보현 보살이 직접 창건하였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650년(진덕여왕 4)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고승인 낭원대사가 913년에 지장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건하였다는 설이다.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는 구체적인 문헌과 당시의 유물과 유적이 전하지 않아 확인하기은 어렵다. 그렇지만 낭원대사가 중창한 시기가 10세기 초반이므로, 적어도 이 시기에서 얼마 오래되지 않는 시기에는 창건되었을 것이라 본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15섹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랑 』의 『강릉부』조에 보현사가 법등을 밝히고 있는 현존 사찰로 나오고 있고, 18세기의 『범우고』에도 보현사 이름이 보여 조선시대에 계속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다만 그 밖의 연혁은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서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보현사중수기』라는 현판이 절에 전하고 있어 다소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1825년(순조 25)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으나 그 뒤 얼마 안 있어 가람 전체가 쇠락되어 1855년(철종 6)에 다시 중건을 하였다.
보현사에 나오는 낭원대사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보현사을 중창한 낭원대사(835~930)는 835년(흥덕왕 10)에 태어났다.
성은 김씨요, 경주가 고향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차이며, 신승이 금인을 주고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8세때부터 유학을 공부하다가 25세 때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하여 정행스님으로부터 개청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 뒤 강주 엄천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일음을 듣고 금강삼매의 진리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3년 동안 혼자서 참선 수행을 하다가 범일국사의 도성의 명성을 듣고 굴산사로 찾아갔다.
"그대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노라." 국사는 크게 반기며 곧바로 스님의 입실을 허락하고 심인을 전하였다.
889년 범일국사가 입적하자 행적 스님과 함께 사굴산문을 이끌다가, 알찬 민규의 청함을 받아 보현사로 와서 도로를 개통하고 법당과 탑을 새로 세웠다. 그리고 913년(신덕왕 2)에는 보현사에 지장선원을 열었다. 전국의 승려들이 선을 지도받고자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 국사로 모시는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세간의 명성에 관심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깊은 산중 사찰 보현사에서 후학들의 지도에 몰두하다가 930년(경순왕 1) 법당에서 앉은 채 입적하였다.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보물 제1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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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 높이 188㎝, 두께 20㎝.
비의 원명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신원낭원대사오진탑비'이며,
귀부·비신·이수가 모두 완벽하다.
귀두를 거북이 모양이 아니라 용머리 같이 조각한 귀부는 고려시대 초기의 탑비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수의 네 마리 용은 중앙에 있는 보주를 다투듯 힘차게 투각되어 있고,
이수의 중앙에는 복발과 1단의 상륜 및 화염에 싸인 보주가 잘 남아 있다.
이 비의 이수 조각이야말로 일품이다.
낭원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자세히 실려 있는데, 비의 석질이 좋아 글씨의 마멸이 거의 없다.
비는 낭원대사가 입적한 10년 뒤인 940년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九足達)이 썼다.
한 글자의 크기는 2cm정도이고,
글씨체는 해서이며, 필세가 웅경하고 예리하여 금석기(金石氣)가 넘친다.
금강루의 금강문을 거쳐 들어간다.
보현사 대웅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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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 참조)
강릉 보현사 소조보살좌상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3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 참조)
강릉 보현사 석조아미타삼존불상과 복장유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 참조)
강릉 보현사 목조보살좌상과 복장유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산중턱에 있는 낭원대사탑을 보러가는 길
가을의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다.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보물 제1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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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에 자리하고 있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무너져있던 것을 사찰입구에 복원해 두었다가,
1991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산꼭대기 주변으로 옮겼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받침돌이 없어져 아래받침돌 위에 바로 윗받침돌이 얹혀있다.
탑신의 몸돌 한쪽 면에는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경사가 급하고,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낭원대사탑비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탑도 이 때 같이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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