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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싸운 일본군, 녹동서원의 김충선과 사야가

들꽃(野花) 2013. 4. 17. 16:30

[대구여행]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싸운 일본군, 녹동서원의 김충선과 사야가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700여척의 왜놈 선단이 부산앞바다에 진격해옴으로써 벌어진 임진왜란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그 승리뒤엔 일본군과 싸운 일본군이 있었다.

나도  얼마전에 TV를 보고서야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을 찾아 눈으로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

 

일본군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 있었다?

일본군이 조선군이 아니라 자기네 편인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항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항왜(降倭), 조선군에 대한 투항한 일본군

그들은 왜 조선에 귀순하였을까?, 그리고 그들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임진년 사월 일본군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옵니다.

금번에 일본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켜, 저를 선봉으로 삼으매, 저의 소원인 조선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본국, 조선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 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다이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 사야가가 보낸 강화서의 내용이다.

 

 

 

 

일본군 우선봉장 사야가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김충선(金忠善)은 누구인가?

 

그리고 달성군에 있는 녹동서원과 달성한일우호관은 또 무엇인가?

 

녹동서원, 달성한일우호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녹동서원 053-767-5790, 달성한일우호관 053-767-5751

 

 

 

녹동서원

 

 

달성한일우호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싸인 시골마을, 사슴이 많아 우록동이라 붙여진 동네, 바로 400년 동안 이어온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다.

임진왜란의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우선봉장 사야가

조선에 투항해 일본군을 격퇴하는 되 많은 공적을 쌓게 되고 그 공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 받은 김충선(金忠善)이 바로 우록리 마을 집성촌의 김해 김씨 시조다.

전쟁이 끝난 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이곳 우록동에 내려와 평생을 살아간 것이다.

 

녹동서원과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사는 사야가인 김충선의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은 것이다.

 

 

 

조선에 투항한 사야가는

곧바로 경상도 의병들과 힘을 합쳐 동래, 양산, 기장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한달동안 여덟차례의 승전보를 올리는 계가를 올려 첨지의 직함을 받았다.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 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어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김해 김씨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그 뒤 오랑캐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자청하여 10년 간 국경방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屯田)으로 삼게 하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이괄의 난 진압에 참여 공을 세운 사실은 승정원 일기 인조 6년 4월 23일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솔한 대장은 항왜영장 김충선인데 사람됨을 말하면 담력과 용력이 뛰어나고 성품은 매우 공손하고 근신합니다. 지난번 이괄의 반란 때, 달아난 부장 서아지를 뒤쫓아가 잡는 일을 경상감사가 김충선에게 맡겼더니 능히 이를 처치했습니다. - 인조 6년 4월 23일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소명(召命)을 기다리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싸움에 출전하여 오랑캐 500여 명을 베었다.  1643년 외괴권관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의 녹리로 돌아갔다.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우록동(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훈 ·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문집에 《모하당문집》이 있다.

 

 

(향양문)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며, 남쪽 고향을 향하여 건립되어 있다.

 

<남풍유감(南風有感)>

남풍이 때때로 불 때 고향을 생각하니

조상의 무덤을 평안한가, 일곱 형제는 무사한가

구름을 보며 고향 생각하는 마음, 봄풀을 보고 솟아오르는 생각이

어느 때 인들 없을쏘냐

 

고향 산천 그리워하는 마음은 떠날 날이 없네

나라에 불충하고 가문에 불행을 끼치고

이 세상서 가장 못난 죄인은 다름 아닌 나

필시 최악의 보기 드문 운명은

나뿐일까 하노라

 

사야가 김충선

유고적 문물과 예의를 따랐던 그는 중국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를 지을 정도였다.

그의 무덤은 마을 뒷산에 일본을 향해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사야가

그는 조선을 위해 태어난 조국을 버렸고, 조선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일본군과 싸웠고, 나머지 일생을 조선인인 김충선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녹동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삼정산(三頂山) 기슭에 자리한 녹동서원은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 장군을 모신 서원으로,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향도(鄕道) 유림(儒林)들의 공의(公議)로 상소(上疏)하여 정조(正祖) 15년 신해(辛亥)(1791)에 건립하였다.

그 후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914년 다시 복원하였으나 후손이 늘어남에 따라 규모가 협소하여 국고의 지원을 받아 1972년 지금의 장소로 이축과 동시에 증축하였다.

 

숭의당

 

선조는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줬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부른다.

 

 

 

 

녹동사 

정조 18년 갑인(甲寅)(1794)에 건립하였고 이후로는 서원과 같이 이축과 증축이 되었다.

모하당 김충선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으로서 선생의 충(忠)과 의(義)의 뜻을 사모하여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내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리의 인물 김충선

한번은 원군으로 와있던 명나라 제독 마귀가 김응서 장군에게 전투를 명령하였는데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 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대는 어찌 사령관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가? 승리는커녕 우리 군사의 희생이 막대하니 그대를 군법대로 사형에 처해야겠소.”

이에 김충선이 나서서 가로막았다. “제가 이 나라에 의탁하게 되는 과정에서 김응서의 도움을 받았소. 응서가 죄를 범하였다 하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그대로 보고만 있겠소? 원하옵건대 제가 대신 왜장의 목을 베어 오겠나이다. 만일 실패할 경우에는 제 머리를 베어서 그 죄를 대신하게 해 주소서.”

이리하여 김충선은 즉시 적을 격퇴시키고 김응서의 목숨을 구했다.

 

 

 

녹동서원 옆에 위치한 달성한일우호관은

2010년 1월 착공하여 2012년 5월 개관하였으며, 모하당 김충선 선생의 귀화 및 귀화 후의 활약상을 내용으로 한 역사관, 3D 영상관, 예절교실, 기획전시관, 전통놀이 및 일본식 정원 등이 마련되어 있어 한.일 문화 교류와 화합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 항왜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여기저기에 기록되어 있는 항왜들의 존재와 그들의 행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왔던 것이 사실이다.

사야가 김충선

그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항왜들의 활약상을 들여다본다.

 

선조실록 30년 11월 22일

권율이 장계하기를, (중략) 항왜 연시로는 말에서 떨어져 칼을 맞고 바로 죽었으며, 부정 임청옥은 칼을 맞고 상처를 조금 입었다. 명병과 항왜 등의 참급은 많게는 70급인데 분주하게 진퇴하는 동안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며, 명병은 두 급을 베고, 검첨지 사고여무는 두 급을 베고, 훈련 부정 이운 ·항왜 동지 요질기 ·항왜 첨지 사야가 ·항왜 염지는 각기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왜기 홍벽 ·흑백의 크고 작은 것 3면과 창 1병 칼 15병, 조총 2병, 소 4마리, 말 1필과 포로되어 갔던 우리나라 사람 1백여명을 빼앗아 오기도 하였다.(중략)

 

인조실록 21년 10월 10일

외괴 권관 김충선

 

그외에 숭정원일기 등에 사야가 김충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역사서에서는 항왜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군이 조선에 투항에 조선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사야가 김충선이 쓴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란 책이 남아있어 항왜에 대한 이야기와 사야가 김충선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게 되었다.

 

 

 

항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을 어떻게 이용하였을까?

일본군은 조총을 조선군은 활을 가지고 초기전투를 벌이게 되는게 조총의 위력에 각 전투에서 참패을 당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조총의 기술을 알아내는 것은 조선군의 전세 역전에 중요한 역활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항왜들에게서 조총의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개천 초기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조선군은 1년 후 드디어 일본군에 뒤지지 않는 조총을 만들게 된다.

전쟁 와중에 그토록 빨리 조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귀화한 일본군, 항왜 때문이다.

 

 

 

 

조총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전에 조선에 조총이 있었다?

1589년 대마도의 영주가 조선 선조에게 조총 몇 정을 진상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조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얼마나 무식한 결론인가 말이다.

 

선조수정실로 22년 7월 1일의 내용을 보자

평의지 등이 공작 1쌍과 조총 수삼 정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야 해도로 놓아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사야가 김충선

그 역시 조선에 조총기술을 전수했다. 지금 보는 것이 그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는 조총이다.

사야가는 조총기술에 전수에만 그치지 않고 1598년 정유재란 때는 울산성을 거점으로 자신이 직접 철포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조총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 1593년 9월

정철총통은 전쟁게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드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다.

이제야 온갖 연구끝에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놈의 총통보다 낫다.

 

 

 

 

가훈

한 가지 덕을 닦아서 후세에 백 가지 경사가 오게 하고,

한 가지 선을 행하여 자손들이 만 가지 복을 받게 하라.

 

 

 

 

 

 

 

1992년 5월 31일 임란 400주년 기념행사 때 세운 신도비 

 

관람안내

운영시간 09:00~18:00 (동절기 : 10:00~17:00)

휴 관 일 신정(1.1) 설연휴 및 추석연휴, 내부공사 및 자연재해 등 특별한 사정으로 휴관할 경우 공지

 

상시 체험 가능한 프로그램 나 이 시간 토요일 체험 가능한 프로그램 비 고
3D 동영상 연령제한 없음 09:30~17:00 전통 다도, 한복, 유카타 체험
(하루 2~3회 실시,
- 오전 1회
- 오후는 참석 인원 및 할당 시간에 따라 1회~2회 실시)
초등학교 4학년 이상, 40명 이내,
11:00~12:00
13:00~15:00
전자 방명록
유카타 체험

※ 한국전통놀이, 일본전통놀이 등의 체험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도체험 예약은 최소 3일 전까지 예약신청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찾아가는 길

 

녹동서원, 달성한일우호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녹동서원 053-767-5790, 달성한일우호관 053-767-5751

홈페이지 : http://www.dskjfrien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