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여행] 한국 전통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항아리굴뚝의 고성 왕곡마을
항아리 굴뚝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고성의 왕곡마을
왕곡마을이 있는 강원도의 고성군은
백두대간과 동해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지형으로 금강산과 설악산 등 빼어난 산세와 검푸를 동해바다를 품고 있다.
왕곡마을은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약 1.5km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가까이 송지호가 있고, 해발 200m 내외의 나즈막한 봉우리 형태인 야산 다섯 개에 둘러 쌓여 외부와 차단된 '골' 형태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동쪽은 골무산, 남동쪽은 송지호, 남쪽은 호근산과 제공산, 서쪽은 진방산, 북쪽은 오음산으로 막혀있고 마을 북쪽에 위치한 오음산에서 남서방향으로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왕곡천 좌우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송지호에서 왕곡마을을 바라보면 유선형의 배가 동해바다와 송지호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의 길지형상을 보인다.
이러한 방주형의 길지는 물에 떠 있는 배형국이어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한때 마을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전한다. 우물이 없었던 시기에는 샘물을 이용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우물을 사용하였다.
왕곡마을의 지형적인 특성과 풍수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지난 수백년간 전란과 화마의 피해가 없었던 길지 중의 길지로서 한국전쟁과 근래 고성지역에서의 대형 산불 때에도 왕곡마을은 전혀 화를 입지 않았다.
이런 지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왕곡마을은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분인 양근 함씨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낙향 은거한데서 연유하며,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생활해 왔다. 왕곡마을은 고려말, 조선초 이래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600년 세월을 이어온 전통있는 마을이다.
왕곡마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 군락이 원형을 유지한 체 잘 보존되어 왔기에 전통민속마을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1월에 중요민속문화재 제 23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왕곡마을의 가옥배치와 구조는
마을 중앙의 개천을 따라 이어져 있는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가옥들이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으며 가옥과 가옥 사이에 비교적 넓은 텃밭이 있어서 따로 담이 없고, 텃밭을 경계로 가옥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 도장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내에 수용되어 있으며 부엌에 가축우리가 붙어 있는 겹집구조이다.
마을 안길과 바로 연결되는 앞마당은 가족의 공동작업 공간 역할을 하면서 타인에게 개방적이었던 반면에 비교적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뒷마당은 여인들의 공간으로 비개방적이다. 뒷마당은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여 여인들의 활동공간을 배려한 구조이다.
'ㄱ'자형 기와집
대부분 가옥의 본체는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관북지방) 겹집구조이다.
부엌에 가축 우리가 붙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독특한 평면형식으로 안방과 도장방,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한 건물에 나란히 배치하고 부엌에 외양간을 덧붙여 겨울이 춥고 긴 산간지방에서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했다.
초가집
본체 지붕 형태는 기와가 20여채, 초가가 30여 태가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가집이 밀집,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행랑채와 부속채의 지붕은 3동이 기와형식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초가 형식으로 41동이 보존되어 있다.
항아리굴뚝
왕곡마을은 집마다 굴뚝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아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고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고성 함정균 가옥,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없는 마당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대문이 없는 개방적인 배치구조이다.
즉 입구쪽으로 대문과 담장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람과 눈이 많은 이 지방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햇볕을 충분히 받고 적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 개방 형태의 마당 구조를 취했으며 가옥의 기단을 높게 만든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외양간과 부엌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고 부엌 앞으로는 외양간을 붙여 온기를 유지했다.
부엌에서 통하는 뒷마당은 비교적 높은 담장으로 남의 시선을 차단했다. 완전 개방된 앞마당과 달리 담장으로 둘러친 뒷마당은 공간을 확보하여 북서풍을 막는데도 효과적이고 산죽(대나무)을 이용한 뒷담을 만든 가옥도 있다.
서까래
모두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실제로 사랑방의 경우 난방을 위한 별도의 아궁이를 만들었고 불씨의 보호만을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을 정도로 겨울의 바람이 드셌다. 또 지붕에 쌓이는 적설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전면 보다 배면의 서까래 직경이 더 굵은 집들이 다수 있으며, 지붕 내부는 환기를 통한 결로 방지책으로 회칠을 하지 않고 산자를 엮은 채로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게 구성하였다.
양근함씨 4세 효자각
오봉마을은 함씨 집성촌으로 함씨 4세 5효각이 있는데 조정에서 효자 집안에 벼슬을 내리고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서기 1820년에 건립된 것이다.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동몽교관을 지내던 함성욱(咸成郁)은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내어 부친께 약으로 드려 병환이 호전되어 연명하였다고 갸륵한 소문이 온 고을에 알려졌다.
효행의 소문이 조정에서 알게되어 나라에서 그에게“조봉대부”(朝奉大夫)의 칭호를 내렸고 그의 아들 인흥(仁興)과 인홍(仁弘)은 부친 성욱(成郁)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덕우(德祐)는 부친 인홍이 병환으로 눕게되니 똑같은 간병이 지극하여“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의 아들 희용(熙�)도 그의 부친 덕우(德祐)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니 병환이 회복되었다고 하며 그가 사망한 후에도 자식된 도리로 3년간을 시묘하는 등 한집안에서 4세 5효자가 났다.
이에 조정에선 이렇게 보기드문 효자집안에 벼슬을 내려주고 이들의 효행을 널리 알려 그뜻을 기리고자 비를 건립토록 하였고 4대효자가 났다하여 4세5효자각이라 이름을 명하였다.
함희석 효자비
이 비각은 함희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69년도에 건립한 것으로 효자 함희석은 부모가 병환으로 눕자 바다에 헤엄쳐 나가 귀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천화로 집안에 큰 불이 나 부모가 큰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지성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등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범의 호위아래 시묘를 산 보기드문 효자로 조정으로부터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이 정문을 내렸다.
왕곡마을 배치도
주변관광지
송지호와 송지호 해수욕장 등이 있다.
왕곡마을에서는
선현들이 살던 바로 그곳에서 선현의 정신과 우리의 전통 문화를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심신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전통 한옥 숙박체험과 먹거리 체험으로 떡매치기, 두부 만들기, 전통전 만들기, 왕곡주 만들기, 한과 만들기 등이 있다.
찾아오시는 길
주소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홈페이지 : http://www.wangg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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