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절집여행] 바람따라 찾아간 남원의 실상사, 마음의 여유를 찾아본다.

들꽃(野花) 2013. 9. 5. 14:01

[절집여행] 바람따라 찾아간 남원의 실상사, 마음의 여유를 찾아본다.

 

절집여행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찾아간 남원의 실상사

오라는 이도 없고, 가라는 이도 없는 말 그대로 나 홀로 사찰 경내를 돌아볼 수 있는 절집

남원의 실상도 예외는 아니다.

훌훌털어버리려고 찾아가서 나는 무엇을 보고 왔는가?

 

인천에서 머나먼 남쪽으로 떠난 여행

나그네의 발걸음과 함께하는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뭉게구름 간간히 떠 있어 실상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제촉한다.

어여가서 부처님을 뵙고, 삼층석탑, 석등, 비, 승탑 등 수 많은 문화재를 사진에 담고싶다.

 

실상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에 주소를 둔 사찰로

일반적인 사찰이 깊은 산속에 있는 반면 남원 실상사는 평지에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특별한 사찰에 무엇이 있을까?

그곳으로 들어가 본다.

 

 

 

실상사경내

 

 

큰길에서 실상사 방향으로 보게되면 좌측에 매표소가 보이고 지금 차가 넘어오고 있는 해탈교가 이곳이 실상사임을 알려주고 있다.

 

 

매표를 하였다면 이제 실상사로 들어가보자.

 

 

실상사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기 직전 좌측에 사람보다 키가 큰 석장승이 턱하니 버티고 있다.

석장생, 석장승이라고도 하는 이 돌장승은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이다. 원래 이곳에는 냇가를 사이에 두고 모두 네개가 있었으나 다리를 건너기 전, 즉 지금 보는 것의 맞은편에 있던 것은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세개만 남아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석장생으로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1년(1725)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하므로,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궂기는 커넝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이 석장승의 이름은 '옹호금사축귀장군'이고 해탈교를 건너서 논두렁쪽에 있는 것이 '상원주장군', 왼쪽에 있는 것이 '대장군'이다.

 

 

 

람천을 넘어가는 다리로 해탈교라 부른다.

이제 실상사를 지키는 석장승을 만나고 해탈교를 넘어 또 다른 2기의 석장승을 만나러 간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꼬?

 

 

람천은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남원의 운봉, 산내면, 아영면, 인월면을 거쳐 24km를 유유히 흘러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파란하늘에 시원스레 흐르는 람천의 물소리를 벗삼아 해탈교를 건너 실상사로 들어간다.

 

 

 

람천의 위아래 어느곳을 보아도 푸르고 파란 하늘에 맑은 물이 흘러 어여들어가 발을 담그고픈 생각이 들게한다.

 

 

해탈교를 넘어서니 오른쪽에 석장승이 반겨이 맞아준다.

좀 무서워야 제맛인데 그리 무섭지 않아 다행이다. 원래 무서운것은 싫은지라~~~

 

 

람천의 하천가에 오래된 느티나무를 우산삼아 버티고 서 있는 석장승,  대장군이다.  대장군의 기단석과 상원주장군의 뒷면에 있는 기록으로 석장승이 세워진 시기를 알 수 있다.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벼 이삭이 풍년을 예약하고 있는 듯하다.

맑은 하늘에 강한 햇빛, 거기레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곡식이 잘 여물어 지고 있다.

 

 

 

너무 늦게 왔나.

아름다운 연꽃이 활짝피어있을 시기가 한참이나 지나버렸다.

안따깝다.

연꽃 사진을 담으면 참 멋있는데~~~

 

 

2008년 5월 4일

지금은 벼를 심고, 연을 심어 놓았으나 그해에는 이렇게 자운영을 심어 놓아 붉은 꽃 밭을 연상케하였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는 가 보다.

붉게 핀 자운영과 연한 잎을 토해내는 5월의 실록이 실상사의 봄을 한컷 뽐내주고 있다.

 

 

 

어허!

이건 왠 하얀 눈.

논의 형태로 보아 연꽃을 심은 것 같은데

 

작년 겨울 12월 22일 눈내린 뒤에 찾은 겨울의 실상사 모습이다.

여행은 끝은 어디일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시간마다 변하고 변하는 자연의 섭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고 싶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실상사를 보고 싶다.

 

 

 

 

천왕문을 들어가자.

천왕문에는 누가 있을까?

사찰에 가면서 제일 신경쓰이는 곳이 사천왕문과 금강문이다.

그곳에 계신 분들을 보면 왠지 섬뜻하니 바로 볼 수가 없다. 아마도 죄를 지은것이 많은가 보다.

죄짓고는 못사는 모양이다.

 

 

 

 

천왕문 사이로 석등과 보광전의 모습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래도 사진을 이렇게 찍으니 나름 멋지다.

 

 

무서워!

 

 

죄짓지 않고 이쁘게 살랍니다.

혹여

죄지은 것 있으면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천왕문을 지나 오른쪽을 보면 범종각과 기와탑이 나그네를 맞는다.

 

 

 

실상사가 창건되고 부터 지금껏 보수와 중건, 중창 등 수 많은 세월속에 나딩굴어야했던 기와들을 모아 놓고 탑을 쌓으니 멋진 기와탑이 생겼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어쩜 살아있는 역사자료가 아닐까?

 

 

약간 턱이 높은 너른 평지에 커다란 주춧돌 같은 것들이 있는것이 아마도 불전이 있었을 것 같다.

 

 

 

하얗게 핀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명부전이 이 가을 하늘에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범종각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

쌍둥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을 조가하였다. 지붕 아래면은 수평이나 윗면 모통이 부분은 위로 지켜올려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은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쪽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다.

 

 

날씨가 화창하니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찍기에 최적이다.

그냥 카메라만 들이대면 작품이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

보광전 앞에 있는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당시의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기둥이 둥근 장고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일반 석등과 다르다.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 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덟 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보광전

실상사의 주 법당으로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건물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보광전 안에 있는 실상사 동종의 하단부에 있는 지도같은 것이 있어 참배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실상사 동종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지금 보광전에 보관하고 있는 종은 강희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이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칠성각

 

 

석등과 삼층석탑

 

 

 

보광전과 삼층석탑, 그리고 배롱나무

오래된 반송나무 아래 서 있는 여인은 어인일로 이곳에 왔을까?

괜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닌지. ㅎㅎ

 

 

 

뜨거운 햇살과 함께 하는 멋드러진 실상사의 모습을 보니 겨울날의 실상사가 생각나 옛 사진을 찾아본다.

하얀눈과 함께 하는 실상사의 모습에 눈이 시원해진다.

마음까지도

세월이 약간 흐르면 이런날이 오겠지.

 

 

 

 

 

이 약사전의 사진은 더 오래된 사진이네.

지금은 내부수리중이어서 아래 사진의 부처님이 임시 건물에 모셔져 있는데 오늘은 이마저도 출입이 통제되어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

 

 

실상사 철재여래좌상(보물 제41호)

통일신라 말 지방의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 불상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리 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극락전을 찾아가는데 주변환경이 예전과 다른 느낌이 든다.

극락전 앞에 이런것이 아니었는데

나의 작은 생각으로는 굳이 이렇게 바꿔야 하는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극락전 오른쪽에 있는 수철화상탑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보물 제33호)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탑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보물 제34호)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극락전

옛 이름은 부도전으로 계오대사 1684년 건물을 짓고 부도전이라 하였다고 한다.

부도전이라 했던 것은 극락전  좌우측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승탑, 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보물 제39호)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탑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극락전의 담장 너머에 핀 상사화의 모습이 애처로이 느껴진다.

 

 

극락전과 비의 몸체가 없어진 증각대사탑비가 가을날을 벗삼아 실상사 한켠에서 오랜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두들 빠져나간 실상사의 모습을 둘러본다.

 

 

 

 

흘러가는 인생살이

잠시나마 마음의 휴식을 취해본다.

 

여행길에서 때론 이렇게 조용한 사찰에 들러 세상 근심사 잠시나마 내려놓으면 어떨까요.

인연이 있어 여기를 찾았고

인연따라 어디론가 흘러가야 하는 우리네 삶을 잠시 쉬어가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실상사 뒷편 소나무 숲 옆에 있는 남원 실상사 승탑(보물 제36호)이다.

실상사만 둘러보고 간혹 놓치고 가는 경우가 있어 여기에 소개를 한다.

 

 

 

 

이제 길을 간다.

내가 걸어왔던 길은 추억의 한페이지로 남겨놓고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걸어가는 길에

함께하는 동행이 있어 즐거운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