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여행]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정재 박태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노강서원
노강서원 (鷺江書院) / 경기도 기념물 제41호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문화가 좋아 오늘도 길을 나서는 나그네
나그네의 발길은 서울과 가까운 의정부시로 향한다.
머나먼 남쪽 나라를 숱하게 다녔지만 수도권의 의정부는 너무나 가까워서인지 그동안 나그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이번에 1박2일로 의정부의 여러곳을 찾아다니려 한다.
서울지하철 7호선 장암역에서 부터 의정부시의 1박2일 여행은 시작한다.
먼저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를 구경하고 수락산으로 올라간다. 원래는 노강서원과 석림사를 찾으려 했으나 일정상 노강서원만 보기로 하고 찬바람이 솔솔하니 불고 그늘진 곳에 잔설이 남아있는 길을 걷는다.
카메라 하나 달랑들고 가는 나그네와는 달리 세계의 지붕이라하는 히말라야 산이라도 등산할 것 같은 완전무장한 사람들이 수락산으로 오르기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간다. 간혹 지나가는 차들을 피해가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재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을 향해 걷는다.
가는 길 좌측 계곡에는 꽁꽁 얼어붙은 얼음과 잔설이 남아있는 사이로 계곡물이 졸졸히 흐르고, 궤산정 정자는 낡아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고 서계 박세당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배향하기 위하여 충렬사를 짓고 그 앞에 정자를 지어 유생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던 청풍정의 흔적인 네개의 돌기둥을 스쳐 지나간다.
<경기도 기념물 제41호 노강서원>
노강서원은 우리나라에 논산과 의정부 두 곳에 있다. 논산의 노강서원은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세원 서원으로 후에 윤문거, 윤선거, 윤증을 모셨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소 남아있는 47개의 서원중 하나이다. 그리고 의정부에 있는 노강서원은 원래 노량진에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란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이며, 향교는 공립교육기관이다. 원래 서원양식은 맨 위쪽의 선현을 봉사할 수 있는 사당과 공부하는 학생의 기숙사인 재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살 수 있는 강당과 서적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노강서원은 모두 생략되어 있고 사당과 동재, 서재만 있다.
박태보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 자는 사원, 호는 정재이다. 서계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숙종 3년(1677)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관직에 나아간 뒤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에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죽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15년 인현왕후 폐출의 부당함을 죽음으로써 간언했던 정재 박태보의 뜻을 기리고 지방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숙종21년(1695) 서울 노량진에 건립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숙종 23년에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으며, 노량진 노강서원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9년에 지금의 자리인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와 출입문이 있으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정재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내부
정재 박태보가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며 올렸던 상소문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주도적 역활을 했던 박태보는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를 가던 중 노량진에서 장독(매를 맞아 생긴 상처)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36세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서원에서는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은 재향이 있는 날 외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노강서원이 있던 자리는 원래 매월당 김시습을 모셨던 청절사가 있던 터라고 하며, 이곳의 유림들은 청절사를 동봉서원이라고 불렀다. 동봉서원의 전신은 폭천정사인데 폭천정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10여년간 은거하던 곳으로 김시습이 서거정과 이곳에서 시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노강서원으로 올라오는 길 왼쪽에 있는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
노강서원으로 오르다보면 만나게 되는 궤산정
궤산정은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정자로 17세기에 건립되었다. 정자 이름은 박세당이 '아홉 길 높이의 산을 쌓는 데에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의 교훈을 주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로 삼태기 '궤'자를 쓰는 궤산정은 육각지붕을 얹은 육각형의 조그마한 정자로 원래는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었던 초당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궤산정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않아 금방이라도 무너져 계곡으로 쏟아질 것 같아 그 옛날 박세당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 정신이 사라질것 같은 안따까운 마음이 든다.
정자 아래쪽 바위에는 건물 아래에는 석천동(石泉洞)이란 암각이 보이는 데 박세당이 쓴것이라고 한다.
노강서원 조금 못미쳐 길 오른쪽에 있는 청풍정 유지
찾아가는 곳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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