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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여행]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록한 북관대첩비 - 정문부장군묘

들꽃(野花) 2014. 1. 3. 06:00

[의정부여행]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록한  북관대첩비 - 정문부장군묘

 

북관대첩비 - 정문부장군묘

 

서울의 경복궁 한켠에 나 홀로 서 있는 비석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이 경복궁 인근에 있어서 점심 식사 후 가끔식 경복궁 나드리를 간다.

경복궁내 좌측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박물관 오른쪽에는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운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그 앞에는 국보 101호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있고 그 옆 너른 잔디밭 한켠에 외로이 서 있는 비석이 있다. 바로 북관대첩비이다.

경복궁에 있는 모든 유물들이 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할 때 원주법천사지 지광국사탑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름아니라 한국전쟁 때 포격을 받아 탑이 산산히 부서진것을 콘크리트 등으로 보수하여 놓은 거라 옮겨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탑도 원주 법천사지에 있어야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하였다가 돌아온 아픈 사연이 있는 탑이다.

그리고 그 한켠에 있는 북관대첩비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쓸쓸한 생각이 든다.

 

경복궁에 있는 북관대첩비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이번 의정부 1박2일 여행에서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인 정문부장군묘를 찾는 기회가 있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문부장군묘 (鄭文孚將軍墓) / 경기도 기념물 제37호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379-32

 

 

 

정문부장군묘를 찾는다.

며칠 전 눈이 왔었는지 묘소 곳곳에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정문부장군묘다.

묘로 올라가는 길 좌측에는 신도비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북관대첩비의 복제품이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

현종6년(1665)에 세웠던 것을 철종 12년(1861)에 추가로 기록하여 세운 신도비로 비문은 황경원이 짓고, 이종우가 글씨를 서승보가 전액을 하였다.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비이다.

 

 

 

 

함경도민들이 세운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빼앗아가 도큐 아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5년에 다시 반환되어 2006년 3월 1일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전달되었다. 이때 북관대첩비를 3개를 복제하여 하나는 경복궁, 병천의 독립기념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정문부 장군의 묘역에 설치하였다.

 

 

(후면부)

 

 

 

잔설이 남아있는 돌계단을 올라간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공적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묘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자허, 호는 농포, 시호 충의이다. 1565년(명종 20)에 한성판윤을 지낸 정신의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선조 18년(1585)에 생원이 되고 선조 21년(1588) 식년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제수 받았다.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함경북도의 병마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 황정욱, 황혁 등을 잡아 왜장 가등청정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 이붕수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각 진의 수장, 조사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으로 진격하여 회령을 차지하고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과 정말수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엿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대치하여 혈전을 벌였으며 왜적 600여 명의 목을 베고 수 많은 군장물을 획득하였다. 이를 길주 장덕산대첩이라 한다.

 

정문부는 길주 왜성을 포위하고 대치하였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온 왜적 2만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다. 왜군은 패전하여 관북지방에서 완전히 철군하여 남하했다. 이때의 승전을 북관대첩비에 기록하였다.

1593년 영흥부사, 1597년 길주목사가 되고 이후 호조참의 예조판서, 형조참판, 창원부사를 지냈다. 하나 그의 임진왜란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창원부사로 재직할 때 초회왕에 대하여 지은 시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1624년(인조 2)에 고문받다가 사망했다. 그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에 따라 신원되었다. 후에 무죄가 증명되어 좌찬성으로 벼슬이 높여졌다.

 

 

 

정문부장군묘는

부인 고령 신씨가 함께 묻혀 있는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 좌우로 1쌍의 문인석이 서 있다. 묘역 동남쪽에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 북관대첩비의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묘포에는 『행아경이상시 충의공 정문부지묘 정경부인고령신씨부우』라고 새겨져 있다.

 

 

 

정문부는 숙종 40년에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경성의 창렬사, 부령의 승열사, 회녕의 현충사, 진주의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정문부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덕사

 

 

 

 

위패

 

 

영정

 

 

 

 

찾아가는 곳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37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