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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여행] 가문의 영광, 불천지위로 사당에 모셔져 있는 하석 박정과 그의 아들 서계 박세당

들꽃(野花) 2013. 12. 28. 06:00

[의정부여행] 가문의 영광, 불천지위로 모셔져 있는 하석 박정과 그의 아들 서계 박세당

 

하석박정영정 (瑕石朴正影幀)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197

 

불천위(不遷位)

불천지위 또는 부조위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낸 것이 허락된 신위

 

서울지하철 7호선 장암역에서 수락산으로 가는 길

큰 도로에서 걸어서 몇분이나 걸렸을 까 길 왼쪽 이정표에 '서계 박세당 사랑채'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안내되는 대로 들어가니 넓은 마당과 오래되어 보이는 사랑채 건물과 그 앞에 우뚝 서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은행나무가 하얗 눈을 바닥에 깔고 의젓하니 서 있다.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된 서계 박세당 사랑채이다.

그리고 사랑채 뒤에 영진각이란 건물이 돌담에 둘러쌓여 있다. 영진각에는 서계 박세당의 아버지 하석 박정 영정과 서계 박세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두분을 반남박씨서계공파종중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영진각

 

 

 

좌측의 초상화가 하석 박정의 영정이고 오른쪽이 서계 박세당의 영정이다.

하석 박정의 영정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석 박정(朴炡)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에 협력했고 홍문관, 좌승지, 대사간, 병조참지, 참의, 강원도관찰사, 남원부사,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 등을 지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2점의 초상화이다. 하나는 푸른색 관복상으로 가로 153cm, 세로 82cm이고, 또 다른 영정은 녹색 관복상으로 가로 169cm, 세로 90cm이다. 박정(朴正)(1596∼1632)은 광해군 11년(1619)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서계 박세당은

박세당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조선 현종 1년(1660)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그의 대표적인 농학서 『색경』을 저술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하석 박정의 초상화로 

2점의 초상화 가운데 하나는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하여 몸체가 너무 크고 화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구도가 어색하나 옅은 갈색을 사용한 얼굴 묘사는 매우 섬세하다. 특히 수염이나 눈썹의 표현은 매우 섬세하여 성격까지도 나타나도록 표현하였다. 화면의 아래 부분에는 양탄자가 그려져 있다.

 

 

가슴에 있는 흉배에는 정3품 흉배에 그려지는 새인 백한이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1623년 박정이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공신이 되어 정3품 벼슬을 하였을 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얼굴 부분과 몸체 부분의 바탕이 서로 다른 천으로 되어 있고 얼굴 표현과 몸체를 비롯한 화면 아래부분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난다. 먼저 그려진 얼굴부분을 토대로 나중에 천을 이어 붙이고 몸체부분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의 초상화는 녹색의 관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구름무늬가 들어간 짙은 녹색의 관복을 입고 백한이 있는 흉배를 하고 있으며 두발은 발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이 그림 역시 낮은 사모와 흉배 등 조선 중기적인 표현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표피를 깐 의자나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발받침 등 조선 후기의 표현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다.

 

 

서계 박세당의 초상화

 

 

 

 

아버지와 아들이 불천위에 올라있다.

이렇듯 불천위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유림불천위 혹은 사불천위가 있다.

국불천위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18명이다.

배향자를 보면

동무(東廡)에는 신라시대의 설총(薛聰), 고려시대의 안유(安裕), 조선시대의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이 배향되어 있고,

서무(西廡)에는 신라시대의 최치원(崔致遠), 고려시대의 정몽주(鄭夢周), 조선시대의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김인후(金麟厚)·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가 배향되어 있다.

 

 

불천위는 그 자손들이 있는 한 분묘와는 별도로 사당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제사를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 혹은 불천위대제(不遷位大祭)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상의 기제사(忌祭祀)는 4대까지만 봉사하고 5대부터는 혼백을 무덤에 묻고 묘사의 대상으로만 한다. 그러나 불천위는 계속하여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기제사는 물론 묘사나 시제(時祭)를 지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앞쪽의 영진각과 뒤에는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가 그리고 그 앞에 약 420여년의 은행나무가 하얀눈과 함께 세상을 밝혀주고 있다.

 

 

 

서계 박세당 영진각

영진각안에는 서계 박세당의 아버지 박정의 초상화와 서계 박세당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서계 박세당 사랑채>

서계 박세당 사랑채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이 저술 활동을 하던 건물로 처음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바깥 사랑채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