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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여행]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백성을 사랑한 어진 성덕을 간직한 세종대왕, 여주 영릉(英陵) - 사적 제195호

들꽃(野花) 2015. 6. 1. 22:33

[여주여행]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백성을 사랑한 어진 성덕을 간직한 세종대왕, 여주 영릉(英陵) - 사적 제195호

 

따뜻한 봄날

나그네의 발길은 여주도자기축제가 열리고 있는 여주 도자세상으로 가고 있다.

여주도자세상 및 신륵사 주변에서 열리고 있는 여주도자기축제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축제로 여주도자기의 멋스러움을 알리는 축제다.

 

여주도자기축제로 가는 길

잠시 한글,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계신 영릉(英陵)을 찾는다.

 

영릉은 한자를 잘 알아야 한다. 왜나하면 같은 묘역에 두 개의 영릉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을 영릉(英陵)이라 하고, 옆에 있는 제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쌍릉도 영릉(寧陵)이 한다.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요즘 한글세대에서는 같은 영릉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195호로 지정된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 능이다.

세종대왕은 제3대 임금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18년에 조선 제4대 왕위에 올라 1450년에 승하하니 재위 32년, 춘추 54세였다.

 

훈민정음,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4군 6진, 대마도정벌,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석보상절, 의방유치 등 수많은 업적을 이룩한 조선 4대 왕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간략히 나열한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간단히 말하지면 이와 같은 일이 140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일이라면 믿겠는가?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셰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세종전 및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발명품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발하여

월인천강지곡(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

농사직설(농업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윤리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한국의 지리책),

석보상절(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치(의학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자격루

조선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

현재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본떠 제작한 것이다.

 

 

 

 

현재의 재실

 

 

 

영릉(英陵)의 재실 터

발굴조사 결과 여러 동의 건물터와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재실터로 확인 되었다.

 

 

 

훈민문

 

 

 

 

 

왕릉으로 가는 길

 

 

 

홍살문(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붉은 칠을 한 문) 너머로 정자각과 왕릉이 보일듯 말듯 하고 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은 여러번 왔기에 오늘은 제17대 효종대왕 능인 영릉(寧陵)을 먼저 찾으려 간다.

영릉(寧陵)의 재실은 보물 제1532호 '여주 효종 영릉 재실'로 지정되었고 재실에 있는 회양목은 천년기념물 제459호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으로 지정되었기에 사진을 찍으려 먼저 간다.

 

 

 

영릉과 영릉사이의 거리는 약 700m로 솔숲사이로 산책하며 다녀오면 좋을 것이다. 두 개의 영릉이 같은 구역에 있으나 효종대왕의 영릉은 출입구와 재실이 따로 있다.

 

 

 

 

효종대왕 영릉을 보고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을 보러 다시 넘어왔다.

 

 

 

영릉(英陵)은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현 서울시 서초구 내덕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하여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옮겨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대부분 서울에 있으나 여주의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영릉(寧陵, 효종대왕), 영월의 장릉(단종), 제릉(개성, 태조 인의왕비), 후릉(개성, 정조)이 수도권밖에 위치하고 있다.

 

제릉과 후릉은 조선이 서울로 궁을 옮기기 전이어서 개경에 남아있는 것이고, 어린 단종의 무덤인 장릉은 청령포에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기에 영월에 있는 것이고 여주의 영릉과 영릉은 서울을 통과하는 한강이 여주에도 같은 한강이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정자각

왕과 왕비의 신좌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정자(丁字) 형태의 건물이다.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장명등 :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것으로 승려의 묘인 부도(승탑)앞에 석등을 설치한 예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릉으로 이어진 것으로 조선왕릉에서는 혼유석 앞에 설치하였다.

 

혼유석 : 혼령이 나와 쉴 수 있도록 능상 앞에 설치하는 직사각형 형태의 돌

병풍석 : 능산 주위를 12면으로 빙 두른것으로 사대석 또는 호석이라고 한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1745년(영조 21)에 세웠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혼령이 다니는 길인 중앙의 신도와 왕 등이 다니는 길로 신도보다 약간 낮게 설치하는 어도이다.

 

 

 

 

 

 

 

찾아가는 곳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번도리), 세종대왕유적관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