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의 문화재답사/사적

[광명여행]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의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능, 광명 영회원 - 사적 제357호

들꽃(野花) 2015. 8. 18. 00:33

[광명여행]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의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능, 광명 영회원 - 사적 제357호

 

사적 제357호 광명 영회원

 

광명의 여행은 따뜻하니 여행하기 좋은 날이다.

오리 이원익선생의 충현박물관과 가학동 지석묘를 둘러보고 인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잠시 방향을 틀어 영회원을 찾는다.

충현박물관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님께서 영회원은 울타리가 쳐져 있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지만

혹시나 하는 맘으로 찾아간다.

 

사적 제357호로 지정된 영회원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장남인 비운의 왕세자인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묘소이다.

 

 

 

 

사적 제357호 광명 영회원

 

 

 

민회빈 강씨는

고려 현종 10년(1919)에 소배압이 이끈 거란의 3차 침입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강감찬 장군의

19대 손녀이다.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강석기의 딸로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된 소현세자와 1627년에 혼인하였다.

 

 

 

 

 

영회원으로 가는 길

조선왕릉의 다른 능처럼 입구가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안내판도 달랑 하나만이 이곳이 영회원임을 알려주고 있다.

 

 

 

 

저 앞 어딘가에 있을 영회원 가는 길

 

 

 

 

 

비운의 왕세자인 소현세자처럼

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어야만 했던 민회빈 강씨의 묘소

묘소의 주변을 둘러보니

쓸쓸함이 묻어나고 있는듯 하다.

 

 

 

 

사적 제357호 광명 영회원

 

 

민회빈 강씨는 1627년에 소현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고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귀국하였다.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달만에 병증이

있은지 3일만에 34세로 급서를 하였다.

 

세자의 독살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입관을 서두르고 강빈과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장례를

매우 간소하게 지냈다.

 

그후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다.

 

평소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세자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였고 왕실을 계속 저주한다고 거짓으로 꾸며대어

인조 25년(1645)에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져나고 그 다음 해 사약을 받았다.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한 세자빈 강씨의 사약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친정어머니와 4형제가 처형 및 장살되는 비극이 있었다.

 

 

 

 

그후

숙종 44년(1718)에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고종 7년(1870)에는 이 묘를 영회원이라 이름지었다.

 

 

 

 

 

영회원 능원의 시설은

봉분·혼유석·문인석·석마 · 석호 등이 있으나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있지 않다.

 

 

 

 

 

 

 

 

 

 

 

 

 

 

 

 

경기-광명-3 보호수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약 400년이며, 수고는 20m, 나무둘레는 6m에 달한다.

영회원으로 가는 길목에 오랜세월을 말없이 그자리에서 영회원을 지켜주고 있는것 같다.

 

 

 

찾아가는 곳

 

사적 제357호

광명 영회원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번지

관리자 :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서부지구관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