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여행] 을미사변으로 일인에 의해 시해된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가 1851년 태어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찾을라하면 왠지 발걸음이 무겁다. 한나라의 국모가 시해되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모가 시해됐을 정도면 나라가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1687년(숙종 13)에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다. 여기서 숙종의 장인이 민유중이라 함은 우리가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자주 듣게 되는 사씨남정기의 주인공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여양부원군이다.
명성황후의 아버지는 민치록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여양민씨의 종손인 민치록이 민유중의 묘를 지키며 묘막에서 살다가 명성황후를 낳았다. 명성황후의 생가이기도 한 이 묘막은 1687년에 지었는데 그동안 쇠락하여 27평만 남았던 것을 1995년 여주시에서 58평 규모로 복원하였다.
명성황후의 공부방이었던 자리에 서 있는 비에는 앞면에 「명성황후탄강구리」(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배수음체경서」(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날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경건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명성황후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1995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사업으로 복원된 생가
제27회 여주도자기축제와 주말이어서 그런지 생가에는 학생들과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명성황후는 아버지 민치록이 여양민씨의 종손으로 민유중의 묘막에서 기거할 때 태어나 8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당시 건물로는 안채 27평 뿐이었으나 성역화사업으로 1976년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생가는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행랑채
대문 양쪽에 붙어 있는 하인들의 방으로 이곳에서 하인들이 농한기에는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일을 하였다
명성황후는 철종 2년(1851) 음력 9월 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여주시 명성로 71)에서 태어났다.
민치록 일가가 언제까지 여주에서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안국동에 있었던 감고당에서 1858년(철종9) 9월 17일 민치록이 사망하였으므로 명성황후가 7~8세까지 능현리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감고당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해 지어준 집으로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1689~1694) 동안 유폐되어 있던 곳이다.
철종이 창덕궁에서 승하(1863.12.8)하고 닷새 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이 익종(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대통을 이어 인정전에서 조선 2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이가 곧 고종이다.
1866년(고종 3) 3월 7일 민치록의 딸 명성황루를 고종의 비로 맞아들인다는 조칙이 반포되었고, 납채례, 납징례, 고기례, 책비례 친영례, 22일 인정전에서 문부백관의 하례속에 상견례가 거행되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나이 만 14세 6월, 비운의 국모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랑채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다. 보통 안채와 바깥 행랑채 사이에 위치하며 사랑방, 대청, 침방등으로 구성된다.
별당
몸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지은 집으로 주택에 부속된 별당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家長)의 다목적인 용도로 쓰여지거나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명성황후의 공부방이었던 자리에 서 있는 비에는 앞면에 「명성황후탄강구리」(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배수음체경서」(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날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경건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정확히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순종의 글씨라고 추정할 뿐이다.
명성황후기념관
기념관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기념관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 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와 영정
옥호루
조선 26대 왕인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옥(玉)으로 만든 항아리 같이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경복궁 내 옥호루에서 전대미문의 국모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에 태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명성황후 국장
일본은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침입시켜서 명성황후를 난자시해하고 시신은 궁궐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렸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광무 일년에 복호(復號)되었으며 1897년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홍릉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과 함께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장하여 자리 잡았다.
시해도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두 번째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칼로서 길이는 1m 20cm 로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런 살상용 칼이다. 칼집에는 [一瞬電光剌老狐](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 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붙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문예관
공연장으로 명성황후와 관련된 행사 등을 위한 문화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
비운의 칼에 의해 시해되 명성황후, 그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새겨 두번 다시는 왜놈들에게 당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에게 그 한을 가르켜 주어야 할 것이다.
찾아가는 곳
명성황후 생가/명성황후탄강구리비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전화번호 : 031 - 880 - 4021
홈페이지 : http://www.empressmyeongseo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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