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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여행] 신라의 마지막 왕, 경주를 벗어난 유일한 왕릉, 연천 경순왕릉

들꽃(野花) 2017. 5. 26. 06:00

[연천여행] 신라의 마지막 왕, 경주를 벗어난 유일한 왕릉, 연천 경순왕릉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번지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묻힌 왕릉으로 1975년 6월 25일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었다.

 

경순왕은 신라 56대 마지막 왕으로  재위기간이 927~935으로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 왕건에게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난 릉이다.

 

 

 

사적 제244호로 지정된 연천 경순왕릉

 

 

 

너른 주차장에 한적하니 나그네의 자동차가 서 있다.

 

 

 

연천 경순왕릉 안내판

2011년 7월 28일 고시에 의해 신라 경순왕릉이 연천 경순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안내판에는 예전의 신라 경순왕릉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고시된 후에 수정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안내판에 있는 능표

 

앞면

신라 경순왕의 릉

 

뒷면

왕(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 무자(928년)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 을미면(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겨 주셨다.

송 태평흥국 무인년(978년),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루 8리 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 정묘년(1747년) 월 일에 다시 세우다.

 

 

 

 

 

주차장

 

 

 

 

경순왕릉에는 문화관광해설을 들을 수 있다.

집사람과 같이 찾아가니 해설사님게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경순왕(재위 927~935년)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휘(諱)는 부(傅)이며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이다.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에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자 일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보냈다고 하여 후일 일명 마의태자라고 불린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을 두었으며,

귀부한지 43년 후인 978년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이 경종 3년(978년)에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 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실전(失傳) 되었다가

조선시대 영조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 양석, 장명등, 망주석 등이 이때 마련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순왕의 운구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하는 이유로 운구행렬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경순왕릉이 이 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게 됨에 따라

신라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 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조선 영조 23)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써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조선후기의 양식으로 재정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결쳐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경순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고 있으며

왕릉의 강(岡)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능상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과 장방형의 곡장을 두르고 있으며,

능의 전면에는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상단 계체석 위에는 능상 앞으로 능표와 상석이  놓여져 있다.

중단에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다.

 

곡장과 호석은 형식과 형식과 문양의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보수를 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신도비의 유래

-현지 안내글-

 

신도비란 돌아가신 분의 업적이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이 비석은 1976년 고랑포구 강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 돌은 고랑포 주민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고

징검다리로 이용했던 돌이라고 한다.

발견 동기는 1976년 백학면 노곡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신 분이

고랑포구에 놀러오셨다가 예사로운 돌이 아님을 발견하고

사비를 들여 고랑포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는데 나중에 관련학자들이

면밀히 분석한 결과 고랑포구 강 바닥에 있었으면 경순왕의 신도비일 것이라고 추정하여

1987년에 비각을 짓고 모셔 놓았습니다.

비 중앙 검은 무늬 부분을 잘 살펴보시면 한자가 열자(字) 정도 새겨져 있습니다.

- 문화광광해설사 김태호 씀 -

 

 

 

 

찾아가는 곳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번지